앞과 뒤의 간극을 아는 것들이 있다

내일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는 스피노자들

by 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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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힌 응어리가 있는 과거에 붙잡혀 사는 이가 있다. 아팠던 그 울분이 늘 따라다닌다. 들어줄 이가 곁에 앉으면 불쑥 치밀어 오른다. 좀 잘 나갔던 과거를 가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이가 있다. 기회만 포착하면 언제든지 꺼내어 흔든다. 당신은 어떤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호르단은 아내 알리시를 사랑했다고 했다. 어느 날 알리시아는 감기 같은 증세를 앓기 시작한다. 감기는 나아지지 않아 그녀는 병상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하물며 그녀는 사람들이 침대를 건드리거나 베개를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마저 거부한다. 결국 그녀는 숨을 거두고 만다.

하녀가 그녀의 흔적이 남은 침대를 정리한다. 베개에서 빨갛게 남은 얼룩을 발견한다. 알리시아의 머리가 누운 움푹 눌린 부분에 검은 얼룩이 보인다. 마치 누군가 오랫동안 깨물었던 자국만 같다. 하녀는 베개를 들어본다. 베개치곤 아주 무겁다. 하녀는 호르단과 함께 베개를 열어 본다.

개봉된 베갯속에는 끔찍한 벌레가 있다. 그 잔혹한 것이 알리시아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인간의 피는 기생충들이 성장하는 데 좋은 먹잇감이다. 그리하여 깃털 베개에서 이런 기생충이 발견되기도 한다는 섬찟한 말로 깃털 베개는 끝을 맺는다.

공포와 긴장감을 녹여내 삶과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돌아보게 하는 중남미 환상 문학 소설이다. 복잡하고 어두운 현실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 환상이라고 할까. 느닷없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스토리이지만, 무의식을 끌어들이는 초현실적인 기법을 도입한 선구자인 오라시오 키로가이다.

산문시처럼 짧지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현대시와도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지도 모르겠다. 키로가는 우루과이 살토시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1살에 아버지가 사냥을 마치고 보트에서 내리던 중에 엽총이 발사되는 비극으로 가족이 보는 앞에서 눈을 감는다. 18살에는 새아버지가 병이 생겨서 자살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것으로도 아득하건만, 23살에 형과 누나가 장티푸스로 나란히 사망한다. 결혼을 했지만 37살에 첫 번째 아내가 염화수은을 마시고 생을 놓고 만다. 키로가는 59살에 위암이란 진단을 받는다. 스스로 청산가리를 먹어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키로가가 사랑과 광기에 미친 소설을 200편 넘게 썼다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아니 아르노는 체험하지 않는 것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체험을 적당히 녹여낸 것에 작가가 상상한 허구를 녹여낸 것이 그녀가 말하는 소설이다. 작가적 해석에 의한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무의식은 키로가도 살고자 죽음을 뒤집어쓴 의식을 꺼내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처절한 몸부림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시각이 굴절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굴절된 안경은 우리 몸에서 흔한 안경처럼 분리할 수 없다. 몸의 일부로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의식에 가치관이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이 것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존 프로그램을 디프로그래밍하려면.

지고의 의식상태는 저 멀리에 높은 곳에 있지 않다고 한다. Here & Now. 지금 여기에 있다. 어디로 가려고 시선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가만히 있으면 될까. 단지 우리가 지닌 관점이랄까 프레임을 조금 바꾸면 된다.

장맛비가 연일 지루하고 두려울 만큼 퍼부었다. 하천을 장악한 흙탕물이 마치 탱크를 밀고 들어온 침공 같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어제 잠깐 햇살이 고개를 빼꼼하게 내밀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나도 몰래 "안녕" 인사를 했다. 물오른 주황나리꽃에 줄무늬나비가 오늘에 충실한 스피노자의 말을 실천하고 있었다.

네 마리의 크기와 무늬가 살짝 다른 같은 종인 호랑나비들은 나리꽃 미모에 빠져 장맛비가 내리든 말든, 죽음이 임박하든 말든, 미친 사랑에 온몸을 던진다. 사랑에 미친 건지 미치고자 사랑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Here & Now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거기에 몰입을 온몸으로 실천한다.

다가오는 불확실한 미래와 지나간 절망스러웠던 과거는 장맛비에 과감히 떠내려 보내자. 올지 안 올지 모를 미래 때문에 황금보다 귀한 지금을 훼손하지 말자. 앞을 보는 것과 돌아본다는 것의 간극은 무엇일까. 과거에 사로잡힌 이에겐 그 간극이 클 것이리라.
어쩌면 과거를 자주 이야기에 올리는 이는 들어줄 대나무숲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어두웠던 과거라면 대나무 빈통에 흘려놓고, 빛나던 과거라면 그 긍정에너지를 오늘에 투여하면 어떨까.

오늘에 정열을 쏟는 호랑나비처럼 현재의 틈을 만들지 않는다면
간극은 다가와 서로를 끌어안지 않을까.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하더라도 오늘 목표량은 훑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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