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을자리는 있는 것일까
꽃자리, 가시밭은 어디에서 정해 주나요
있어야 할 자리란 게 있는 걸까
친구는 말했다. 그동안 네가 착하게 살더니 이제야 온 우주가 돌려주는 것 같다나. 나의 좌우명은 두 개였다. 하스돕돕과 영어로 된 간편한 문장인 No pain no gain이다. 뱅커로서 근무하면서 어찌나 물 샐 틈을 안 주는지 화장실에 물 빼러 갔다 오면 고객의 눈치가 세모꼴이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꽉 채웠다 다녀온 것이지만 코앞에 앉은 고객 입장에서는 그걸 알리 만무하다,
배정 맡은 업무마다 지뢰밭이었다. 마치 일을 먹구름같이 몰고 다니는 물귀신인 양 업무가 빵빵 터졌다. 이를 테면 ㅇㅇ청약통장이 출시되면 줄을 서서 가입자들이 는다거나, ㅇㅇ세대 적금이 만기도래되어 줄을 서거나, 아파트 중도금대출 신청자가 몰려오거나 또는 미국의 fang을 가입하려고 떼로 몰려들었다. 옆 부서 직원은 점심시간을 칼같이 한 시간 쓸 때
나는 삼십 분조차 눈치가 보였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좀 인심을 써서 대기줄을 줄이고 식사하러 가면 다 식은 반찬에 건더기는 없는 국으로 허겁지겁 먹기 일쑤다. 오후 네 시가 지나면 가스가 찼는지 더부룩하고 체했는지 명치가 자주 아프곤 했다.
월급날인 21일이 되면 금융치료를 받았다. 그만두고 싶은 주기가 오 년에 한 번씩 왔지만 그 숫자뒤에 붙는 0의 크기로 눌러버렸다.
참 이상도 했다. 내가 발령이 나거나 계이동을 하고 나면 내 업무를 둘이 하게 했다. 나는 떠나고 난 뒤에야 전임 근무지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내 고과에는 그게 크게 소용되지 못한다. 전임지보다 현근무지가 현재이므로. 현재가 과거보다 중요했고
나는 떠난 후에야 정담에 오르는 이상한 업보를 가졌다고나 할까.
일머리를 좀 아는 나는 일을 빨리 처리하고 쉬는 게 좋았다. 뒤늦게 그게 내 커리어엔 마이너스가 됨을 깨달았다. 뒤에서 볼 때에 나는 한가한 사람처럼 보였다. 좀 개기고 좀 요령도 피우면서 좀 생색도 내고 힘든 척도 하고 앓는 소리도 했어야 했다. 빠른 일처리는 더 많은 업무를 분장받고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고객 수를 던져 주었다. 그야말로 너는 일에 치여 살아라였다.
꿈은 점점 아득해졌다. 낭만은 어둠 속에서 기생하고 문학은 심연의 깊은 늪속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물었다.
"너는 꿈이 뭐였어?"
"어? 난 늘 작가가 꿈이야. 이상하게 그것만은 변하지 않네."
"그럼 지금이라도 도전해 봐. 너 예전에 글께나 써서 상도 꽤 받곤 했잖아!"
"에이, 이제 와서 되겠어?"
"야! 너는 그게 문제야. 왜 안된다고만 생각하냐?"
"그렇잖아, 신춘은 온리원이잖아. 몇십 년 손 놓았는데 갑자기 되겠냐?"
"되지! 그리고 신춘 안되면 문예지도 있어. 내가 알아봐서 링크 보내줄 테니까 오늘부터 써 봐."
그가 보내준 링크를 오픈했다. 그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시를 쓰려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매일 한 편씩 썼고 모아서 보냈다.
이상도 하다. 뱅커로 일하면서도 일복은 많았지만 인복? 은 그다지였다. 좋은 사람 나랑 잘 맞는 상사는 복권이 당첨되거나 전근 가거나 아파서 휴직하거나 하면서 나를 떠나갔다. 일은 힘들어도 관계가 도우면 힘든 줄 몰랐다. 일이 힘든데 그것까지 보태면 파김치가 되었다. 문운이란 것이 있는 줄은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문학에 발을 담근 뒤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잊을 만하면 잡히곤 한다. 그의 말대로 뒤늦게 미안해서인지 내 선함? 인지는 몰라도 운이 꽤 좋다.
한동안 잠도 안 자고 열심히 글을 빼냈더니 요즘은 휴지기가 된 것 같다. 글 재는 있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독서로서 휴식하고 있다. 봄이 되면 에너지를 태울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하는 것에 비해 일찍 피곤을 느낀다. 나는 겨울잠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