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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후 Jan 22. 2024

이마에 딱밤 주는 난방비

한겨울 지갑 털리는 관리비에 후들후들

난방비 피폭  그 후



동장군은 물만 얼리는 것은 아니다. 네모난 방이란 테두리에 사람을 가둔 그는 사람의 마음조차도 얼려보려 시도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보이는 것은 마구 파고드는 칼바람이 벼린 시퍼런 날에 귀는 벌게지고 냉철한 철마저 식은땀을 흘리게 한다.


네모라는 도형이 쌍둥이처럼 각을 잡고 위용을 떨치는 도시의 마천루와 쌍벽을 이루는 숲인 아파트에 살고 있다. 더울 때는 에어컨 사용으로 전기요금이 청구된다. 동장군이 득세하는 강추위에는 지역난방인 우리 아파트는 관리비에 난방비가 청구된다.


얼마 전 관리비 고지서를 확인한 순간, 눈과 입이 떠억 벌어졌다. 이번 겨울은 특히나 매듭달부터 일찍 동장군이 등장했기에 각오는 했었다. 난방비만 오십만 원이 넘게 나오다니요? 해도 이건 너무했다. 어디선가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난다. 난방비가 많이 청구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따뜻하게 지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상기한 글이다. 자세히 내막을 들여다보니 난방 기본요금이 인상된 것도 한몫했다. 거기에 사용량에 따른 누진세가 붙었을 것이다.


우리는 동장군으로 움츠리고 있는데 지구 반대편에선 한증막더위로 사람이 죽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본다. 왜 이렇게 세상은 부익부 빈익빈 경제용어처럼 돌아가고 있는 걸까. 같은 한반도지만 중부지방은 눈이 쌓이는데, 아랫지방에선 가뭄이건만 눈조차도 내리지 않는다. 논바닥은 메말라서 쩍쩍 갈라지고 핏방울이 배어나고 있다. 긴급 수혈이 필요하지만 피를 내줄 하늘은 깜깜무소식이다. 옛날처럼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까. 이집트에선 파라오가 백성들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보는 신성한 의식이 있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와중에 피난하는 지구라는 제목에 이끌려 주문한 책은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어슴푸레 알고는 있었다. 전에는 듣지도 못한 미세 먼지, 초미세 먼지란 용어는 매일 내가 사는 청주에서 특히나 지수가 높다. 아이들이 바깥 활동 시에 이 지수를 확인해야 한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마스크가 생활화되기 전엔 이 지수로 아이들의 등굣길에 마스크가 추가되었다.


우리가 환경과 실랑이하는 동안 자연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자연은 아프냐 안 아프냐 문제가 아닌 사느냐 죽느냐 경계선에서 고군분투한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특히나 그들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바닷속에서는 플랑크톤이 사라진 자리에 산호초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산호초마저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매일 밥상에 오르는 김과 다시마, 미역을 더 이상 맛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학명을 단 해조류에 우리의 장기를 노출시켜야만 한다. 생각해 보았다. 필자처럼 소음인은 소화기관이 특히 약하다. 익숙한 먹거리에도 탈이 자주 나는 위장을 가진 사람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니리라. 하물며 낯선 먹거리에 적응해야 한다면 얼마나 내장기관이 힘겨울까. 과연 적응 기간이 얼마나 걸릴까. 적응하기나 할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무분별한 공존 파괴는 전쟁을 부른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과거엔 기후가 지금처럼 심각하진 않았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마저 무분별한 벌목과 수렵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과거를 더듬어본다. 필자가 어릴 땐 오월이면 보이는 건 다 녹색이었다. 밭도 밭이지만 논이 많았다. 논에는 밭엔 보이지 않는 물이 있다. 옛 어른들이 제일 듣기 좋은 소리가 제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라고 했을까. 그런 논이 풍부했을 땐 열대야가 이렇게 심하진 않았다고 감히 단언하려 한다. 부채 하나 갖고 한여름을 나지 않았나. 현재는 왜 이다지도 여름이 힘겨운지 모르겠다. 체중이 준다.


시난고난한 여름에 순응하려 몸부림친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다. 적도에 가까운 자연물들은 더 심한 여름 날씨에 정면으로 맞서다 자멸하고 있었다. 극소수가 살아남아 피난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갈 수 있는 범위는 범주 안에 있다는 현실에 맞닥뜨릴 것이다. 지구는 안으로 파고들면 지름이 점점 작아지기에.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적응하느냐 도망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의 저울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차라리 행복이다. 작금의 현실은 그것마저도 기회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한다. 과연 생각하는 갈대인가. 바람에 그저 흔들리고만 있는 갈대는 아닐까. 신을 형상화했다는 만물의 영장이 과연 온당한가 이 책은 진지하게 묻고 있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탈출마저 막는 영장이 아닌 풀어주고 적응시키는 것이 맞지 않을까. 기후는 우리의 내일을 불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생물학적 지표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빨리 인지하고 행동할 것인가. 지켜만 볼 것인가. 자연은 벌써 행동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공존할지 전쟁할지 그건 우리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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