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가 지났다. 겨울의 끄나풀이라도 잡아보려는 날씨다. 봄을 품고 있는 바람에 항거하는 수은주이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걸어둔 패딩 잠바를 다시 꺼내 입는다. 평생 친구와 역을 향해 출발한다.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바깥임에도 성큼 봄마중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옷차림이 제각각이다. 빨간색 재킷, 베이지색 트렌치코트가 어색하지 않은 건 춘삼월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음이리라.
넉넉하게 시간을 확보했기에 마음이 여유롭다. 빠듯한 일정표는 가슴을 졸리게 한다. 예약된 자기 공명 영상 검사가 있어 대학병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추적 검사는 말 그대로 뒤따르는 후속 순서이다. 달갑지 않은 촉박함을 구태여 보태고 싶진 않다. 안 그래도 병원 소독약은 불안이 고갤 들지 않던가.
세상에 아픈 이가 많다. 병원에 올 적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가 상상보다 많다는 걸 체감한다. 생로병사는 숨탄것들의 숙명이다. 관리 대상인 병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 중에서도 최고봉이 아닐까. 외래 건물에 있는 자기 공명 영상 센터는 아동 병동을 지나간다. 세상의 때라곤 찾을 수 없는 티 없는 어린아이가 링거를 꽂고 지나간다. 밤톨 같은 두상에는 외모를 빛내는 머릿발이라 칭하는 한 가닥의 그것이 없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비껴간다. 행여나 모르는 사이에 연민이 스친 눈을 보진 않을까. 그것이 못내 두렵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당도한 접수처에서 번호표를 뽑았다.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호명한다. 오호통재라. 생각보다 일찍 검사를 마치려나 보다. 동생이 탈의실에 들어간 사이 그의 소지품을 챙긴다. 다리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 그가 절룩이며 나온다. 얼른 일어나 팔을 잡아 부축해 자리에 앉게 했다.
낯선 여인이 다가왔다. 팔오금에는 주삿바늘을 꼽고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핏발 선 눈이 언뜻 보인다. 초면인 내게 서슴없이 말을 건넨다. 부산에서 새벽에 상경했다 한다. 얼마나 말이 고팠으면 낯선 내게 말을 걸을까. 자신의 일정을 내게 줄줄 읊는 여인에게서 나는 독거노인인 엄마를 본다. 얼추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인다. 일방적으로 직진하는 그녀의 말속에서 나보다 젊은 나이란 걸 낚았다. 뇌종양을 앓았다는 과거형에서 난 표정을 급히 갈무리한다.
동행이 있음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여인은 혼자 왔다. 동생과 함께 이야기 나누며 서로를 챙기는 그림이 괜찮았나 보다. 암을 제거 후에 관찰 중임에도 혼자서 수없이 열차를 탔다고 한다. 씩씩한 기운이 넘친다. 그녀의 일신상 정보들이 참 겁도 없이 내게 자진하여 투신한다. 내가 그녀를 캐낸 것이 아닌 그녀가 일방적으로 투척한 것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그녀의 눈은 말보다 더한 진한 그리움이 보인다. 그 더께가 내 앞에서 높이를 갱신하고 있다.
신선한 해산물도 장기간 방치하면 부패한다. 몸 어딘가에 쌓인 말도 그러지 않을까. 동떨어진 섬에서 방치한 말은 부패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말도 신선한 것으로 바꿔줘야 하지 않을까. 잠을 줄여 새벽을 뚫고 홀로 ktx란 섬에 올랐을 그녀가 보인다. 장시간 상경한 이의 부패한 말을 꺼내도록 도와주리라.
경청이란 적극적인 공감이다. 그녀의 팽팽한 눈동자가 서서히 느슨해진다.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덜어내고 싶었을까. 이 순간 동생이 조금 더 늦게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후딱 지나간다. 나는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추임새를 넣는다. 대기 좌석에 사람들이 꽤 있음에도 홀로 온 이는 없는 듯하다. 그녀의 신상 명세가 이력서인 양 내 앞에서 한 줄씩 채워지고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그녀의 허한 말풍선에 나는 적극적인 공감을 넣어 주리라.
그녀는 전사였다. 남자도 하기 힘든 몸과 기술로 그녀 말로는 밥 벌어먹고 사는 이었다. 그녀가 씩씩한 이유는 기계 조립이란 업이 설명하여 준다. 검사 마친 후 부산행 열차에 탑승해야 하며 삼일절에 다시 서울행을 해야 한단다. 드센 일을 하지만 마음은 허한 백색 병원이다. 초면인 그녀와 나는 말을 적게 주고 되로 받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인 말을 줄인다.
혼자 살 순 있겠지만 소통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늙을수록 말은 줄이고 지갑을 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싱겁다고 웃을 수만은 없는 일리 있는 말이다. 이상하게도 지갑을 열기보다 말을 열게 된다. 받는 이는 적고 배설하는 이만 늘어난다.
글도 그렇다. 요즘은 독자보다 작가가 많다고 하지 않던가. 배설이 필요한 세상에 산다. 되도록 말은 줄이고 귀의 창을 활짝 열어보려 작은 귀를 쫑긋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