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회억해보면 어쭙잖게 염세 곁에서 얼쩡거리곤 했다. 굴러가는 돌멩이 하나에도 까르르 또래들이 자지러질 때 탄생에서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고찰로 카오스에 빠져 있었다. 밤에는 환상의 나래를 펼쳤으나 일쑤 흐지부지 끝났다. 호기심의 그늘이 불현듯 드리울 때면 떨칠 수 있는 저항력이 나름 생겼지만, 시절의 나는 미숙하여 그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현실의 굴레를 걷어내려는 소리 없는 아우성에 속이 시끄러웠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은 감쪽같이 몰랐다. 그저 말이 없고 수줍은 소녀로 내성적이라 했다.
글이란 표면에서 볼 수 없는 안의 티겁지를 알게 모르게 들뜨게 한다. 담임의 심부름으로 교실에 들어간 나를 굳이 옆자리에 앉힌 음악 선생님이 생각난다. 내 손을 꼭 잡더니 왜 그렇게 삶을 진지하게 사느냐고 한다. 십 대는 십 대답게 소녀는 소녀답게 어리광도 부리고 까탈스럽게 살라는 거다. 부지불식간에 엉뚱한 직언을 들고 황당했으나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내 글을 읽으신 거였다. 선생님은 등을 쓸어내리며 꼭 그리해야 한다며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기운이나 힘으로 셀수록 살아가는데 굉장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맥이 있다. 명사적 의미로 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이다. 거미는 그물로, 나무는 잎맥으로, 사람은 인맥으로 망을 확장한다. 이에 셀럽은 밴드, 별 그램, 너튜브, 얼굴 책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디지털이 없던 시절 나에게는 아날로그 맥이 있었다.
등 뒤로 구불거리는 긴 머리와 붉은 입술, 원색을 매치한 눈에 뜨이는 의상으로 기억하는 음악 선생님은 각이 잡힌 여성스러운 이름을 소유했다. 음악보다는 패션 디자이너가 어울리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특별하게 전교생을 대상으로 반 별 합창대회를 해마다 개최했다. 열성적인 응원이 담긴 격려와 포상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합창 연습에 매진하면서 음악에 소질이 뛰어난 또래가 많다는 것에 꽤 충격을 받았다.
영향력은 처음부터 휘몰아칠 수도 있지만 잔잔하게 시작해서 하울링으로 울려 퍼질 수도 있다. 지휘자인 반장 M은 합창을 지도할 수 있었고, 반주자 K는 당시에 월광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내 짝 S는 비올리스트가 되었다. 당시에 나는 피아노 한 번 본 적 없어 표지에 건반을 그려 연습하던 애였다. 문화 폭풍을 직격탄으로 맞아 파도에 휩쓸렸다. 음악에 눈떠 팝에 한동안 빠졌고,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시작한 영화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풍긴 문화의 향기에 매혹되었다. 변방에 살던 시골뜨기가 문화예술에 흠뻑 빠져 오래 머물 것을 그들은 몰랐으리라.
어떤 동물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종을 돕기도 한다. 바다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해변으로 밀려온 길잡이 고래들을 돌고래는 바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이끌어 준다. 물에 빠진 사람이 상어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구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게다가 괴팍한 성격으로 알려진 하마 또한 얼룩말이나 누의 새끼 같은 어린 초식 동물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강둑으로 밀어 올려 준다. 이타심은 인간만이 지닌 특성이라고 생각했으나 동물도 감정을 느끼고 행동에 옮긴다는 것이리라.
첫 책을 출간한 뒤 감사한 점이 많았다. 최소한의 주위 사람들에게만 알렸다. 시문학회 문인 선생님들에게 드릴 시집을 준비해 가져갔던 날 하필이면 장날이었다. 유명한 시인이 특강 차 왔다. 낯부끄러워 열지도 못한 가방을 그대로 가져왔다. 노력이 아닌 운이란 것에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로또 한 장을 사지 않는 나이다. 사행심엔 한눈팔지를 말자 스스로 다독였다. 뜻하지 않은 사람들이 시집을 알리고, 구매하고, 도서관에 비치해 주고 있다. 대학교에서는 지도교수였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를 돌아가며 낭독했다고 한다. 생면부지의 독자가 내 시집을 필사하고 있다.
날아가는 휘황한 새들을 감탄하며 바라본 적이 있다. 그 화려한 깃털이며 비상하는 추진력을 단 날개를 눈으로 좇았다. 날갯짓이 화려하기까지 수없이 부딪고 부리도 깨뜨린 그들만의 그늘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부러워 나도 날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천은 생각 끝이 아닌 손과 발 지문이 남아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걸 미처 몰랐다. 공부하면 할수록, 쓰면 쓸수록,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이 쓰는 길인 것 같다. 그 길에서 지치지 말고 즐기라 고마운 인연들이 온기를 불어넣어 준다. 바다에만 있다고 생각한 돌고래들이 육지에서도 긍정을 뿜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