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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후 Apr 08. 2024

시무룩한 어른이 배웁니다

봄은 무르익은 선거의 계절


DD가 아직도 귀가하지 않았나? 이제 막 초등 고학년 선배가 된 DD를 꽃샘주위가 한차인 주말에 만났다. 경치 좋은 카페를 가는 길이었다. 나에게 내민 하얀 종이 한 장. 이게 뭘까? 연애편지인가. 이모에게 주는 그 귀한 걸. 두 번 접은 A4 용지를 떨리는 맘으로 펼쳐보았다. 오, 이런.


우리 DD가 회장 선거에 도전하는구나. 꼬물꼬물 하던 아이가 언제 커서 선거에도 나가고 참으로 대견한 Girl. 우리 DD는 평소 말이 별로 없는 아이였다. 어찌나 말도 없이 혼자 척척 하는지 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한 적도 있다. 보통 아이들은 참새처럼 재잘대는 것이 일상이 아닌가. 어찌나 궁금한 것이 많은지 대답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진다는 에피소드가 지천에 깔리지 않았나.


알고 보면 DD는 사려가 깊은 아이이다. 나이답지 않게 자기만의 철학이 있고, 엄마 아빠에게는 재간둥이이며 사랑의 오작교 역할도 톡톡히 한다는 후문을 듣곤 했다. 다만, 낯가림이 있을까. 음전하단 게 정답에 근접하겠다. 한때 큰 슬픔을 겪었던 전적이 있어 조심스레 살펴보지만 구김살이 없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모습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년에 회장 선거에 도전했었다. 당당하게 첫 선거유세에서 친구들의 많은 선택을 받아 회장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는 도전할지가 미지수였다. 듣기로는 회장은 수학 도우미, 체육 도우미, 환경 도우미 등 솔선수범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또 도전한다고 하니 봉사 정신과 도전 정신이 투철함에 슬며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DD가 준 종이를 읽었다. 또박또박 쓴 정갈한 글씨가 동글하니 예쁘기도 하다. 반장 선거 발표문을 스스로 쓴 공약문이다.

‘나 DD는 누구보다 먼저 청소를 하고, 뒷정리와 선생님을 돕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모두가 어울리는 학급이 되도록 솔선수범하겠습니다. 저 DD를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하거나 그럴싸한 멘트는 아니지만, 작년에 했던 것처럼 궂은일을 맡아하겠다는 공약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DD는 문구가 괜찮은지 궁금했나 보다. 나는 엄지 척을 높게 올려주었다. 친구들의 환심을 살 만한 거창하거나 웃기는 문구는 아니지만 어디 선거가 인기투표는 아니지 않은가.


사실 나는 음악을 가미한 거창한 문구가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걸 발설하지 않았다. 문구는 아마도 아이나 선생님의 감탄 어린 환호성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아이의 진솔함을 무기로 스스로 도전하여 성취하는 것이 더 DD에게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도와준답시고 나의 문구를 들이밀기보다 아이의 내면의 힘을 믿었다.


“사랑해”

드디어 톡이 왔다. 소리만 들어도 누구의 톡인지 나는 알고 있다. 두근두근 탐탐이 울린다. 내가 선거 유세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가슴이 콩닥콩닥 하이 햇 심벌을 두드릴 일이냐. 점점 빨라진다. 어디 보자. 어?


‘이모, 아쉽지만 두 표 차이로 회장에서 미끄러졌어요. 부회장은 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이 학기에 회장 선거에 다시 도전할 거예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DD야. 나간 것만 해도 너는 이미 승리한 거야. 깨끗이 승복할 줄도 알고. 부회장은 거절하는 의지도 표현하고. 이 학기에 이모가 뒤에서 주먹 쥐고 응원할게. 잘했어!'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산꼭대기에 오른 자(있을까? 있다는 가정을 세우자)는 좌절이 없다. 실패할 때 다시 일어선 자는 영광의 참맛의 물을 마실 수 있다. 실패의 끝이 어디쯤인지를 알고 있기에 성공이 더 달콤하지 아닐까.

오죽하면 에디슨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을까.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DD는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크게 상심하지 않았다.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다음을 노리는 아이로 한 뼘 성장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나는 최근 어린 조카만도 못한 실패에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오히려 조카에게 응원을 받아야 할 듯싶다.  DD의 빛나는 눈빛에서 어른아이인 나의 눈빛을 잠시 숨겨본다. 실패로 방패 삼아 곧 2차전을 준비해야겠다. 늘 다음은 준비된 자에게 오는 것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성장을 통해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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