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을 감수할 준비
은서의 출판사 책상 위에는 두 권 분량의 원고가 쌓여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그녀가 3개월째 붙잡고 있는 난해한 독일 철학서의 번역 원고였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투고된 가족 심리 에세이의 가제본이었다. 뒤의 제목은 ‘침묵의 집에서 살아남기’였다. 필자는 ‘유성 ’이란 필명을 사용하는 중년의 남자였다. 원고는 가족 내 무기력과 그로 인한 정서적 학대를 외부인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은서는 이 원고를 읽을 때면 심장이 날카로운 얼음에 찔리는 듯한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원고 속의 '무기력한 가장'은 청소 강박과 경제적 무능을 동시에 가진 아버지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희생하는 어머니'는 침묵을 통해 가족을 지키려다 결국 스스로를 갉아먹는 수정의 모습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 같았다.
유성의 원고는 가족의 문제로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지적인 언어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유성의 원고 구절 중 부분이다.
'가족 간의 '침묵'은 소음보다 더 폭력적이다. 소음은 외부에서 오지만, 침묵은 내부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소리의 부재이며, 이는 곧 구성원 간의 '정서적 공백'을 의미한다. 무기력한 구성원은 자신의 공백을 타인에게 투영하며 이로 인해 집은 거대한 체념의 블랙홀이 된다.'
은서는 붉은 펜으로 이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그녀에게 원고는 그동안 보던 흔한 작업물이 아니었다. 자신이 갇혀 있는 섬의 정확한 지도이자 그 섬을 파괴할 수 있는 외부로부터 밀려온 파도였다. 원고를 편집하며 제 가족의 무기력함을 객관화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객관화는 곧 거리 두기여서 거리를 두는 만큼 그녀의 고독은 깊어졌다. 그녀의 동상이몽인 가족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가 이 원고 앞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