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를 먼저
짧은 이야기를 통해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혹독한 질문과 그에 대한 열두 살 예진의 서툰 대답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예진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어머니의 상실입니다. 갑작스러운 부재는 가족의 형태를 바꾼 것뿐 아니라 주변 세상과의 관계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뿌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가 흔히 '다 겪는 일'이라 치부하기 쉬운 슬픔이 한 아이의 내면에서 어떻게 격렬한 분노와 혼란이 미묘한 방어 기제로 작동하는지 탐구하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열두 살의 세계는 불완전함과 동시에 가장 순수하기도 합니다. 그 나이 아이들은 아직 세상의 잣대와 정의를 완벽하게 내면화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외부의 무심한 질문들에 더 크게 상처받습니다.
"엄마는 왜 돌아가셨어?"
"아빠 혼자 힘들겠네."
같은 사려 깊지 못한 말들은 예진에게 '나는 뭔가 특별해 따라서 불쌍한 아이'라는 불편한 정체성을 강요당합니다. 이 소설에서 조명한 부분은 예진이 그런 주변의 시선과 잣대를 스스로 분리하고 거부하려는 주체적인 노력입니다. 아이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슬픔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정의하려는 작은 영혼이니까요.
예진이 비로소 삶을 긍정하게 되는 힘은 완벽한 위로가 아니고 '서툰 사랑' 안에서 나옵니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 현수가 있습니다. 아내는 완벽한 빛이었으나 현수는 그것이 사라진 후 남은 그림자 속에서 서투르게 고군분투합니다. 헌신적이지만 감정 표현에 서툴고 요리는 서툴지만, 딸을 위해 매일 식탁에 앉으려 합니다.
예진이 아버지의 불완전함을 통해 비로소 어머니라는 완벽한 이상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현실의 '진정한 가족'을 깨닫는 순간이 이야기의 중요한 단면입니다.
또, 이야기에는 예진의 삶에 '작은 빛'을 비춰주는 따뜻한 조연들이 등장합니다. 때로는 사려 깊지 않지만 꾸준하고 순수한 우정, 담임 선생님의 섬세한 배려는 예진이 다시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되어 줍습니다. 이들을 통해 한 사람의 성장은 큰 구원자가 아니라 일상 속의 작고 사소한 연대와 이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믿음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 상징인 '빛과 그림자' 그리고 '해바라기'는 슬픔과 희망의 양면성을 의미합니다. 엄마가 사랑했던 해바라기는 부재의 슬픔을 상징하는 동시에 예진이 고개를 들고 다시 해를 바라보게 될 미래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이 빛과 그림자의 단면을 관찰하며 나아가는 여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 삶의 그림자 속에서 잠시 멈춰 선 열두 살의 마음과 그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에게 '불완전해도 괜찮다'는 서툰 위로를 건넵니다.
긴 서두를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5년 첫날, 은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