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별의 미학

이십 년 단짝을 놓아주었다

by 은후

<보라 >

마주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쓰는 편지




가을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방 안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러나 공기 속에는 묘한 눅눅함이 감돌아, 목과 가슴을 눌렀다. 어쩌면 이십 년의 정을 놓아야 하는 날이 다가와서 일게다. 시간이라는 무정한 손은 소중한 것일수록 오래 붙잡을 수 없다는 진실을 끝내 우리에게 새긴다.


오늘 나는 너를 보낼 준비를 했다. 네가 내 곁에 머물렀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네 무릎 위에서 나는 세상과 이어졌고 그 끝없는 길 위에서 나 자신과 조우했다. 단 한 번의 사고도 없이 나를 품어준 네 평온한 성정을 생각하면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게으른 주인 탓에 너는 본래의 질주 본능을 끝내 모두 펼치지 못한 채, 묵묵히 그 모진 세월을 견뎠다. 마치 뒷골목에서 목을 길게 뽑고 눈을 밝히는 가로등 같았다. 삼만 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지만, 그 안에는 내 삶의 사시절이 다 들어 있었다.


너는 오래도록 침묵의 동반자였다. 그 침묵이 나를 위로했고 나의 무표정을 견디어 주었다. 여행을 꿈꾸지만 나서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넌 묵언의 여정을 계속했다. 나는 오래 아껴 두려 했지만, 그 마음을 네가 먼저 알아챈 듯하다. 너의 심장인 엔진이 멈추던 날, 너는 스스로 숨을 고른 듯 조용히 시간을 멈추었다. 어쩌면 그것이 네가 내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너는 나의 두 번째 애마였다. 첫 차는 즉석복권 당첨된 대학생의 일탈 같은 잠깐의 행운처럼 스쳐갔고, 너는 그 빈자리를 채우며 내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네 부드러운 가죽시트, 손에 닿던 온기, 그리고 미묘하게 다르게 울리던 엔진의 호흡이 모두 그리움이 되었다. 너와 함께한 차 안은 세상과 나를 구분 짓던 작은 우주였다.


비 오는 날 와이퍼의 박자, 주말 아침의 한가한 드라이브, 라디오에 흘러나오던 익숙한 멜로디들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너는 나의 감정에 묵묵히 반응하며 때로 친구, 때로 위로가 되어 주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네 품 안에서 흘려보내면, 너는 고요한 엔진음으로 다독이듯 대답했다.


철학자들은 말한다. 만남에는 언제나 이별이 새겨져 있다고. 그러나 그 예견된 이별이 이렇게 애틋할 줄은 몰랐다. 너는 결코 단순한 운송수단은 아니었다. 너는 내 삶의 연장이었고, 나의 일부였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소유물로 여기지만, 나에게 너는 동반자였다. 나의 웃음과 울음, 침묵과 꿈이 모두 네 무릎 안에 머물렀다.


오늘 오후, 나는 너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다. 네 보닛 위에 열쇠를 올려두고 널 눈에 마지막으로 담고서 자리를 돌아 나오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잘 가, 내 친구, 고맙다. 네 덕분에 나는 살아 있었다.'

멀어지는 견인차의 소리가 어쩐지 너의 숨결처럼 들렸다. 어쩌면 그건 내 마음이 낸 발자국이 흔들리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이별이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순환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너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서 또 다른 주인을 만나 길을 달릴 게다. '폐차'라는 냉정한 말속에서도 나는 너를 따뜻하게 기억할 거다. 너는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정직하게 달려준 존재였다.


삶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씩 성숙해 간다. 네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별이 주는 슬픔이 아니라, 사랑이 남긴 온기였다. 너를 떠올리는 일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하나의 감사가 될 게다.


잘 가.

남은 내 추억 속 길 끝 어딘가에서 또 만나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