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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끈

실타래를 풀어보면

by 은후

<파랑>

기억은 우리의 삶을 엮는 실타래다. 단순히 과거의 조각을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다. 우리 존재의 결을 잇는 징검돌이며 서로의 마음을 잇는 다리이다. 때로는 그 다리가 세월의 바람에 휘고 무너져 관계의 강 위로 떠내려가기도 한다.

루이스 부뉴엘의 말처럼,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

그의 말은 철학의 언어를 넘어, 존재의 가장 깊은 고요를 흔든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속 ‘길 잃은 뱃사람’ 지미 G.는 그 명제의 살아 있는 증언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는 자신을 지워버린 그림자처럼 부유했다. 지미는 시간을 건너지 못한 영혼, 과거의 한 점에서 영원히 닻을 내린 배였다. 기억이 꺼진 자리에서 인간은 관계의 고리와 더불어 자아의 빛마저 잃어버린다.


주말 나들일 했다. 엄마와 함께 근처의 코스모스 꽃밭을 걸었다. 비에 젖은 꽃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그 위를 나는 꿀벌들은 여전히 생의 의지를 노래하듯 윙윙거렸다. 잔잔한 흙냄새 속에서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하며 걸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한 목소리에 엄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은발의 여인이 환한 웃음으로 다가오며 엄마를 불렀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정말 오랜만이네!” 그 목소리엔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엄마의 눈빛은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이름은 귀례가 맞는데, 얼굴이 낯설다고 했다. 세월은 얼굴의 윤곽을 바꾸고, 기억은 그 틈새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그 순간, 관계를 잇는 실마리가 얼마나 가늘고 섬세한 것인지, 그리고 그 실이 풀릴 때 얼마나 조용히 멀어지는지를 보았다.


기억은 단지 사건을 되짚는 기능이 아닌 게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정서의 직조물이다. 엄마와 여인의 재회 속에서 반가움은 있었지만, 동시에 그 위에 얇은 어색함이 내려앉았다. 이름은 남았지만 얼굴이 사라진 그 단절이 생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큰 공백을 만드는지 새삼 느껴졌다. 기억이 흐릿해질 때 관계의 색감도 바래진다. 그러나 속에는 여전히 어떤 온기가 남아 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모습만 바꿔 우리 마음의 한편에서 은밀히 살아 있을 뿐이다.


지미 G.의 삶은 기억이 사라진 인간의 항로를 보여준다. 그는 과거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를 계속 반복하며 살았다. 새로운 얼굴, 새로운 인연이 매번 낯설어지는 세계이다. 그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동그랗게 맴돌며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기억이 끊긴 곳에서 인간은 자신을 더 이상 서술할 수 없다. 부뉴엘의 말처럼,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엄마의 순간적인 당혹과 미소 속에서도 보았다.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조각이 우리를 타인과, 과거와, 그리고 자신과 잇는 마지막 다리가 된다는 것을.


그렇다면 기억은 무엇일까. 마음이 스스로를 간직하기 위해 짜놓은 감정의 그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목소리, 바람결에 섞인 냄새, 오래된 이름 하나에 다시 피어나는 온기이다. 엄마가 귀례란 분을 떠올릴 때에 그 이름에는 함께 웃던 봄날과 부엌에서 맛본 국물 냄새, 해 질 무렵의 대화가 함께 섞여 있었다. 얼굴을 포함한 외모의 상이 변하자 그 향기는 방향을 잃었고 기억 속 풍경도 희미하게 부서졌다. 그러나 부서진 기억마저 삶의 일부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상실하고 다시 기억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한 여전히 고동친다.


코스모스 꽃밭의 길을 걸으며 새삼 그 이중성을 느꼈다. 비에 눌린 꽃대는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무게를 닮았고, 그 위를 나는 꿀벌은 잊힘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생의 본능을 닮았다. 기억 또한 그러한 게 아닐까. 희미해지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가 여인의 얼굴을 잊었어도 이름 하나로 추억의 빛이 다시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기억은 바람에 날리면서도 결코 끊기지 않는 실로 우리 내면의 가장 오래된 노래이다.


기억은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뿌리이자, 타인과 나를 이어주는 가지이다. 지미 G.의 망망한 시간은 그 뿌리가 사라진 세계의 공허를 보여주었고 엄마의 재회는 잊힘 속에서도 남아 있는 기억의 빛을 보여주었다. 기억은 맑으면서도 안개 같고, 단단하면서도 휘발된다. 그러나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민다. 코스모스 밭처럼, 빗물에 잠겨도 꿀벌이 다시 날아드는 생명의 자리처럼, 기억은 우리를 이어주는 따뜻한 물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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