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D-day는 내일이었습니다. 평소 준비성이 투철한 모친의 성정을 알기에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각인 오후 한 시에 친정을 방문합니다. 현관 앞에 20kg 절임 배추 다섯 상자가 계단 쪽을 보고 정렬해 있습니다.
모친은 출타 중인가 봅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갑니다.
"누구세요?"
엄마는 출타 중이 아닙니다.
배추가 현관에 와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엄마가 당황해하십니다. 저녁에 올 것으로 예상하고 느긋하게 김장 준비를 하려고 하셨습니다. 유비무환 정신이 몸에 밴 엄마는 이미 풀을 끓여 놓았고, 마늘 및 생강도 다져 놓았으며 갓과 쪽파도 잘라 김치 냉장고에 보관 중입니다.게다가 고춧가루를 잘 섞어줄 일곱 가지 재료가 들어간 육수도 식혀 놓았습니다.
제가 할 일은 강판에 무를 채 써는 것과 뒷 모도 도와주는 겁니다. 바닥에 앉아 손질해 놓은 무를 들고 강판에 채를 썰기 시작합니다. 설거지는 잘해도 김장처럼 큰 일을 혼자 해본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습니다. 모두 모친과 시어머니가 버릇을 잘못 들인 결과입니다.
신혼 때부터 양쪽에서 김치를 해 주셔서 제가 주체적으로 담아본 적이 없습니다. 몇 년 전 엄마가 병원 신세 지고 있을 때 딱 한 번 김장을 했습니다. 돈은 돈대로 들어갔는데 식구들이 맛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 입맛에도 별로였습니다. 좋다는 재료는 전부 집어넣었는데도 사 먹느니만 못했습니다.
계량컵을 이용하여 정확한 배합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양쪽 어머니 손맛은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만든 김치는 그야말로 거들떠도 보지 않는 짠지가 되어 김치찌개에나 들어가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오늘 엄마가 하시는 걸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습니다. 찹쌀 풀도 이미 해 놓으셨고, 눈 대중이라 계량컵에 익숙한 제게는 눈썰미는 무용지물일 듯합니다. 팔순 엄마 덕분으로 둘이서 100kg 김장을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정말 대단합니다. 얼마나 피곤하실까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집에 와서 손전화랑 미소를 주고받는 사이 뜨근한 것이 흐릅니다. 손등으로 쓰윽 문질렀습니다. 헉, 붉은 선혈입니다. 코피가 꽤 났습니다. 엄마는 오늘 밤 앓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에서 아들이 김치통 갖고 도착했다고 합니다. 내일 할 줄 알지만 이미 게임은 종료 휘슬이 울린 지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엄마의 노고로 저희 남매 내년까지 김치는 파김치, 배추김치, 갓김치, 총각김치를 원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