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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Aug 17. 2024

5.이대로 있고 싶다고 이대로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미해결 과제 - 나의, 혹은 우리의 한 때

    소개팅에 입고 나갈 옷을 골라 달라던 대화를 마지막으로 너와의 연락이 점점 뜸해졌다. 소개팅이 성공적이었나. 그럴 거면 그때 내 손은 왜 잡았어. 네가 밉기도 했고 너는 아무 생각 없었을 텐데 혼자 착각하고 의식하는 나 자신이 싫기도 했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 한 달 후, 갑자기 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ㅇ월ㅇ일 저녁에 뭐 해, 약속 있어?


    너의 소개팅은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소개팅에 실패하고 심심하니 연락 오는 행태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자존심도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가 짜증 났다.


    저녁을 먹고 거리를 걷다 네가 예매해 둔 공연을 봤다. ‘별생각 없이 두 장을 예매해 놓고 나니 너도 이 가수 좋아하는 게 생각나서. 네 덕분에 알게 된 가수이기도 하고.’ 그걸 네가 왜 기억해. 왜 이렇게 나를 헷갈리게 해. 나에게 그 가수를 알려준 건 전 남자친구였다.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공연이 끝나고,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쉽다는 너에게 내일 출근을 핑계로 대고 일찍 집으로 왔다.


    안부를 묻는, 혹은 우스운 이야기를 나누는 연락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가끔 커피나 술 한 잔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너에게는 여자친구가 생겼다. 그동안 너에게 만나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는 꽤 인기가 있었는데, 쉽고 산뜻한 시작과 별개로 그 연애들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너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친구와는 연락이 상대적으로 뜸해지고 단둘이 술을 마시는 자리는 만들지 않았다. 나도 연락을 삼가게 되었다. 고민이 생겼다며 연락을 자주 하면 여자친구분이 싫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곧 헤어질 테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그때 얘기해도 되지 뭐.


    이번 연애는 제법 길었다. 너의 상대적으로 긴 연애는 나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아, 내가 이대로 있고 싶다고 해서 이대로 있을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어느 한쪽의 연애상태가 변하면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는 거구나. ‘성인이 된 후에 만난 이성인 친구’라는 관계에는 암묵적인 유효기간이 있었다. 둘 중 하나가 결혼이라도 한다면 그때에도 우리가 친구일 수 있을까? 가능한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너와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이번 연애가 끝나면 결과가 어찌 되든 내 마음을 전해봐야겠다고 혼자만의 용감한 다짐을 했다.


    다짐 이후의 어느 날, 너의 프로필 사진에서 여자친구가 사라졌다. 헤어진 건가. 다짐을 실천해야 할 때가 온 건가. 오래간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며 연락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너는 어딘지 모르게 지친 얼굴이었다. 밥을 먹으며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카페에 앉았다. 너 어제 크게 싸우고 헤어지자고 말했다가 여자친구가 붙잡았는데, 마음이 커서 헤어지지 못하고 있지만 여자친구로부터 자꾸만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것 같아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처럼 다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며 관계에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네가 그것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 여자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를 더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과 만날 자격이 있었다.


    ‘네가 더 이상 이 연애로 상처받지 않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헤어짐을 종용하는 것 같아서. 네가 그 여자와 깨끗이 끝내기를, 그리고 이왕이면 나에게 오기를 바랐지만 헤어짐의 이유가 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너는 특별한 친구’라고 자꾸 말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모두와 친하게 지내지만 너처럼 둘이 만나서 대화 나누는 친구는 많지 않다고, 너는 참 따뜻하고 특별하다고 하는 말이 일종의 고백으로 들리기도 했고 절대 고백 같은 거 하지 말라는 방패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또 한 번 비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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