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고 변상으로부터 배운 것
일기를 매일 쓰려고 했는데 어느새 며칠을 건너뛰어버렸다. 기록은 쉽지 않구나. 변명을 하자면 처음 건너뛴 날은 야간열차를 타느라 어쩔 수 없었다. 불을 전부 끄는데 어떡하냐~ 지금이라도 기억을 짜내봐야지.
시드니 마지막날, 날씨가 좋으면 태풍 때문에 못 걸은 코스탈 워크를 걷고 싶었는데 오전에 날이 흐리길래 포기하고 시내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호스텔에서 동행을 만나 브런치를 먹었다. 뭔가 서로 과하지 않게 잘 맞을 것 같은 친구였다. 함께 먹은 치킨 와플은 맛있었다. 브런치 타임이 끝나고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책 쳐다도 못 볼 줄 알았는데 드디어 읽게 됐다. 약간 눈물 나는 구절이 있었는데 옆에서 회사일을 하는 동행에게 왠지 부끄러워서 꾹 참았다. 그 후로는 쇼핑센터와 마켓을 구경했다. 페더데일 동물원에서 사 온 인형 가격에 대해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내 코알라가 제일 저렴하고 귀여워! 유명하다는 캄포스 커피도 마셨는데 그냥 쏘쏘 했다. 걷다 보니 달링하버가 나와서 거기서도 잠깐 앉았다가, 한류 제대로 보여주는.. 하마 필름에서 네 컷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저녁으로는 차이나타운의 국물이 끝내주는 해물관자국수를 먹고 멜버른으로 넘어가는 야간 기차를 타러 갔다.
캐리어를 끌고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기괴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봤다. 멀리 서는 행위예술이나 거리공연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고 마약에 취한 사람이었다. 풍경만 보고 앉아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나라에 살면서도 마약을 하는구나. 아니 그래서 마약을 하나? 인생에 자극이 부족해서? 자극 청정 국가에 살아서…? 모르겠다. 약간 무서워져서 빠른 발걸음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옆자리가 비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는 다르게 바리바리 보부상 카우보이가 착석했다. 기차 여기저기의 비매너 행동들에 매섭게 철퇴를 놓아서 오우 쏘 예민 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찹찹 섬세하게 바른 스킨 냄새가 아주 좋아서 기차 안의 다른 냄새들을 싹 눌러주니 고마워졌다. 무던 과 센스가 공존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센스 있는 사람은 예민하다.
기차는 달리고 달려 한 번의 노을과 여명을 보고 멜버른에 도착했다. 야간 기차... 생각보다는 탈 만 했는데 다시 타고 싶지는 않다. 어느 순간 내 버킷리스트에서 사라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가 떠오른다. 젊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하라는 게, 그 나이대에만 얻을 수 있는 생각이나 느낌이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마 그때가 지나면 힘들고 피곤한 일은 굳이 안 하게.. 혹은 못하게 되어버려서였나 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때가 아니면 다른 누가 말리고 방해하지 않아도 그냥 조금 더 늙은 내가 안 하게 된다. 아무튼 간에 멜버른 도착.
멜버른은 시내 구간 내에 요금을 내지 않고 트램을 탈 수 있는 프리 트램존이 있다. 요금을 내지 않고 트램을 타는 게 처음에는 되게 신기했다. 표에 펀칭을 안 했다고 벌금을 삥 뜯겼던 베를린의 추억…. 덕인지 돈을 내지 않고 대중교통을 타는 게 엄청 마음이 쫄렸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그냥 타길래 나도 녹아드는 척을 해봤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햄치즈 토스트와 플랫화이트 한 잔을 사들고 체크인을 했다.. 가 일이 생겼다. 왜 이렇게 여행마다 하나씩은 사고가 생기는 것 같냐. 호텔 정문 출입키를 엘리베이터 틈새에 빠뜨렸다…….
방이 있는 층에 내릴 때 한 손에는 커피, 다른 손에는 캐리어랑 출입키를 들고 있었는데 출입키가 손에서 툭… 상황 파악 하는 사이 스르륵….. 진짜 나를 조롱하듯이 출입키에 달린 그 긴 목걸이 줄이 스르륵…. 엘리베이터 틈 사이로 사라졌다. 아직도 그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다. 어. X 됐다. 하는 놀란 마음에 일단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소파에 앉았다. 호스트한테 얘기해야지… 빵 먹으면서 기다려야지… 이 소파 좋네… 하다가 여기부터 숙소까지는 출입키 없이 비밀번호만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땡스 갓…. 숙소에 들어오니 출입키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변상금이 얼마라는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너무 열받는 한편으로 다들 출입키를 많이 잃어버리나 보다 싶어서 안심이 됐다.
다수의 여행 사고 변상 경험(나도 알고 싶지는 않았다)을 통해 느낀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제일 별 거 아닌 문제다’라는 것이다. 10만 원 언저리의 금액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면 다행인 일이다. 쓰린 속을 달래며 사온 커피와 빵을 먹었다. 한 손에 커피만 없었어도 출입키를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왜 하필…!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와서 기분을 망치려 했지만 엘리베이터 그 좁은 틈새로 빠질 거였으면 그냥 그럴 운명이었구나 하는 게 속 편하다 되뇌며 생각을 눌렀다.
뜨거운 물로 야간 기차에 지친 몸을 씻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오늘은 좀 쉬어가려고 마켓, 쇼핑몰만 간단히 보기로 했다. 제대로 못 자고 왔더니 피곤했고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 물놀이를 할 게 아니라면 실내에 있고 싶었다. 시드니에서는 ‘아 남반구까지 왔는데 조금 더 제대로 여름이면 좋겠다’ 했는데, 막상 태양이 작열하니 10분 만에 힘들어지는 갈대 같은 인간이여…. 공산품 마켓은 별 게 없었고 식료품 구경이 재미있었다. 생굴을 낱개로 팔길래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었다. 다음번에는 텀블러에 화이트와인을 담아와서 같이 먹어야지 생각했다. 예전에는 굴 하나에 사천 원??! 하면서 한국 굴이랑 뭐가 크게 다를까, 초장 없이는 비릴 것 같다 하고 안 먹었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궁금하고 이 정도는 먹어볼 수 있지 싶어서 먹어봤다. 두 번째 '이게 돈 버는 맛인가' 모먼트.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정기적인 수입이 있다는 것이 주는 마음의 여유인가 싶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저녁에도 갈까 말까 고민하던 식당에 다녀왔다. 4만 5천 원 아끼고 평생 맛보지 못하는 것보다 그냥 돈을 쓰는 게 낫다. 언제 또 멜버른까지 와서 저 식당을 가보겠어. 굴은 하나도 안 비리고 정말 맛있었다.
식료품 구경을 마치고 마켓레인 커피에 갔다. 사실 마켓레인 원두는 한국에도 수입되고, 한국에서 마셔봤을 때 특별함을 못 느꼈었지만 그래도 본토에서 현지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건 다르지 않을까 하고 가봤다. 역시나 굉장히 균형 잡힌 맛이었고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카페인 충전용 저가 커피에 길들여진 미각은 높은 수준의 밸런스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걸 맛있다고 느끼지는 못한다. 마켓레인 대신 원두향이 진하던 빅토리아 시장 원두가게에서 원두를 사고 아울렛으로 향했다. 클리어런스 상품을 뒤져 마음에 드는 셔츠와 니트 하나씩을 샀다. 잃어버린 출입키 변상금을 저렴하게 옷 산 걸로 마음에서 퉁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쇼핑을 끝내고 나오니 날이 조금 흐려져있었다. 너무 뜨거워서 실내로 피신했었는데 막상 흐리니 아쉽더라. 어쩌라는 건지. 쇼핑몰 근처 야라 강변 펍에서 깔라마리와 맥주를 주문했다. 이번 여행의 첫 여름다운 메뉴인 것 같다. 애초에 술을 곁들인 식당에서의 식사가 이번 여행 중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진짜네, 세상에. 얼마나 알뜰살뜰했던 건지. 이제 들어가서 쉴까 먼저 멜버른을 왔던 친구가 강력 추천한 재즈바를 가볼까 고민하던 중, 시드니에서 같이 브런치를 먹은 동행이 비슷한 시점에 멜버른으로 넘어와서 같이 재즈바에 가기로 했다.
아니 이만큼을 썼는데 아직 그저께 내용인 게 말이 되나..! 너무 졸리다. 자야겠다. 내일 이어 써야지….
멜버른 도착을 알리려 부모님께 메시지를 드리며 변상 소식도 업데이트했었다. 엄마가 '너는 여행 갈 때마다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겁 안 먹고 다음 여행 또 가는 게 신기하다'라고 했다. 정말 어쩐 일인지 여행에 꼭 한 번은 변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니면 부상을 당하거나. 가이드 무전기를 잃어버린 로마, 캐리어가 분실되고 감기에 걸린 리스본, 에어비앤비 가스레인지 덮개를 폭발시킨... 프랑스 렌, 발목을 삐고 카메라를 부숴먹은 또 한 번의 리스본, 무지막지한 교통 벌금을 맞은 베를린, 그리고 출입키를 엘리베이터 틈 사이에 빠트린 멜버른........ 모아놓고 보니 대체 여행을 어떻게 다녔나 싶네. 대단한 사고뭉치 같잖아.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 걱정 안 시키고 점잖은 편인데 해외만 나가면 왜 저런 사고를 몰고 다닐까. 한번 곤란에 빠지고 나면 겁먹을 만도 한데 계속해서 혼자 여행을 나가는 원동력은 뭘까. 나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