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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Apr 02. 2023

유자차 끓이기

달큰하게 절여둔 여행의 기억

    "낡고 지친 마음, 기다릴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하며 냅다 끊은 여름방학 비행기 티켓. 기다림의 설렘은 현생에 지친 마음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7월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니까. 그때 떠오른 노래는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브로콜리너마저 '유자차' 가사 中) 다가올 여행의 포슬포슬한 설렘보다 진하게 달큰한, 오랜 시간 푹 절여뒀던 여행의 기억이 필요해. 그때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되살려봐야겠어.


    공식적인 나의 첫 해외여행은 갓 20살이 되었을 때에 할머니와 함께 갔던 이탈리아-스위스 패키지여행이다. 수능 이후 엄마 아빠는 나에게 할머니와 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어디 따뜻한 휴양지에 가서 본인들 대신 효도관광 하고 오라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나는 할머니에게 바티칸에 가자고 말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 할머니는 11시간의 비행에 잠시 망설였지만 '죽기 전에 교황님 계신 곳에 가봐야겠다'며 나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패키지여행의 장점은 무엇보다 편하다는 것이고, 단점은 (아무래도 직접 찾고 고르고 고생하는 부분이 덜하다 보니)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수많은 성당들, 동행 모두가 말리는 데도 무릎기도를 하며 계단을 오르던 할머니, '이제 대학 간다고? 헛 정 들지 말고 100일마다 애인을 갈아치우렴' 하시던 동행 아주머니, 엄청 비쌌던 알프스 위에서의 컵라면 등등.... 몇몇 장면들이 남아있지만,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아직까지 그때의 여행 이야기를 하시고 그녀의 행복이 나에게도 뿌듯함이 되지만, 개인적으로 그다지 인상 깊은 여행은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째 해외여행은 장학재단에서 단체로 떠났던 일본 오사카-교토 지역 탐방이다. 이 역시... 초밥이 맛있었고, 타코야끼가 너무너무 뜨거웠고, 여우 신사의 주황빛 기둥들이 멋졌으나 자세한 부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의 유자차는, 푹 절여진 여행의 기억은 2018년 1월의 유럽에 있다. 포르투갈 리스본, 포르투, 프랑스 렌, 몽생미셸,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거쳤던 3주 간의 여행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 한다. 여행에서 작은 수첩에 매일 썼던 일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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