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 가방이 지금 Lost 됐다는 말이지.
Day 1
출국 전날 감기에 기숙사 화재경보기 오작동에... 미신을 깊게 믿는 편은 아니지만 그냥 뭔가 불안했는데 아직 별 일이 없다. 창가 쪽에 앉은 외국인 부부가 음료를 너무 많이 마시고 화장실을 자주 갔던 것과 환승 공항 카페 점원이 커피 사이즈 뭘로 할 거냐고 다그친 것 빼고... 어쨌든 일신이 안전하니 다행. 약발이 생각보다 받아주는 것도 너무너무 다행이다. 뭐 간단한 거 사 먹고 또 약 먹어야지. 빵은 싫어서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공항 안 식당 메뉴판 몇 개 보다가 결국 먹은 건 버거킹... 왜 외국인 관광객들이 맥도널드, 스타벅스 가는지 너무 이해해 버렸다. 영어 최고 아는 맛 최고!!
환승 공항에서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첫날의 일기를 쓰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별일'이 생긴다. 마치 '아빠 꼴도 보기 싫어! 가버려!' 하며 싸운 아들은 아버지를 결코 다시 만나지 못하고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듯이.... 묘하게 아련한 필터 효과 속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내는 꼭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듯이.... 코난의 범인은 이 안에 있지만 제일 먼저 의심당하는 사람은 진범이 아니듯이.... 뻔한 클리셰인 것이다.
첫 유럽 자유여행의 설렘과 긴장을 가득 품은 채 리스본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반긴 것은 깜깜한 새벽이었다. 지금은 전보다 조금 덜 무모하고 조금 더 벌기 때문에 시간대가 요상한 비행기 편은 최대한 피하려고 하지만, 21살 배낭여행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저가'였으므로 오밤중에 도착하는 일정이 탄생했다. 입국 수속을 빠르게 밟고 캐리어도 빛의 속도로 찾으면 지하철을 타고 리스본 시내까지 갈 수 있다는 구글맵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탓도 있다.
새벽이라는 사실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있었다. 캐리어가 분실된 것이다. 얼른 짐을 찾아 지하철 막차를 타러 가야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가방이 나오질 않았다. 빈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몇몇 승객들과 함께 목이 빠져라 가방을 기다리던 중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이게 무슨 일이람.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자 공항 직원이 다가와 이 쪽으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Lost & Found'
그러니까, 내 가방이 지금 Lost 됐다는 말이지.
- 여기 이 서류를 써. 가방을 혹시 찾게 되면 거기 적은 숙소 주소로 보내줄게.
'혹시 찾게 되면'??? 당신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해. 지금 당장 가방을 받기는 아주 글렀고, 앞으로 받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자 배꼽에서부터 불안이 올라오며 눈물이 고였다. 수중에 있는 것은 기내에 들고 탔던 간소한 짐뿐. 환승 공항에서 휴대폰을 충전할 생각으로 휴대폰 충전기를 마지막에 캐리어에서 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해봐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가는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 '안 돼 여기서 울면 안 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두 시를 향해 가고, 가방이 있든 없든 일단 숙소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늦어 지하철은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 했다. 거구의 관리인이 '너 지금 들어가면 지하철 끊겼어도 다시 이쪽으로 못 나와'하며 문이 닫힌다는 시늉을 보였다. 캐리어 분실로 이미 한껏 쪼그라든 마음이라 그런 도박을 할 수가 없었다. 계획에 없던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를 불렀는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잘 잡히지도 않았고, 겨우 잡힌 택시는 내 위치를 정확히 짚지 못해서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가방도 없이 덩그러니 떨어진 겨울의 유럽에서 새벽 택시를 기다리려니 몇 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나를 찾아낸 택시 기사님은 친절했고, 택시 안은 따듯했지만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새벽에 혼자 택시를 타는 것은 서울에서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20대 한국인 여성 지난 새벽 리스본에서 실종' 같은 기사가 나는 건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당연히도 혹은 다행히도 택시 기사님은 나를 목적지에 안전히 내려주고 사뿐히 떠나셨다.
예상치 못했던 또 하나의 난관은 숙소 입구를 찾는 일이었다. 지도에는 분명히 이 건물이 맞는데, 옆에 있던 경찰관 분들께 숙소 예약 바우처를 보여주며 이 숙소 주소가 여기가 맞냐고 물어도 봤는데, 건물 외부에는 간판이나 표지가 전혀 없고 건물 문은 양쪽 모두 잠겨있었다. 한참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 망연자실 서 있자 길가를 지나던 취객들이 '니하오', '세뇨리따' 하며 추근대기 시작했다. 근처에 경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무서워졌다. 여행 첫날부터 이게 다 무슨 난리인가, 두렵고 서러운 마음에 문 근처에 있던 알 수 없는 버튼들을 전부 다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네 번째 버튼쯤이었을까,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네. OO호스텔입니다.
- 나! 여기! 예약했어!
악에 받쳐서 거의 소리를 질렀다. 삑 소리가 나더니 방금 전까지 굳게 닫혀있던 문이 덜컹 열렸다.
짐이 왜 이렇게 단출해요? 내 사정을 알리 없는 리셉션 직원이 물었다. 항공사가 내 캐리어를 잃어버렸어요. 오 저런, 꼭 찾길 바라요....... 직원의 안쓰러운 눈인사를 뒤로하고 방에 들어왔다. 풀 짐도 없어서 바로 샤워실로 갔다. 칫솔 치약은 기내에 챙겨 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양치를 하고 물로 샤워를 했다. 정수리부터 따뜻한 물을 맞으니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눈물이 났다. 그래도 오늘 밤 노숙은 면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