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
아 어제는 정말... 캐리어는 없어졌지 거리에는 술 취한 것 같은 사람들 많지 호스텔 문은 안 열리지... 이대로 길거리에서 밤을 새워야 하나 싶어서 너무 무섭고 아득했는데 한숨 자고 나니 여전히 가방은 없지만 한결 낫다. 뭐 맛집 찾고 할 기력까진 없고 배가 고파서 그냥 호스텔 밑 카페에서 에그타르트랑 크로와상, 라떼를 먹었다. 크로와상은 종류가 두 개였는데 주문을 잘못했는지 조리법이 다른지 아무튼 달달한 소프트롤 같은 게 나왔다. 유럽 커피는 따뜻한 것 밖에 없다더니 진짠가보다 아무것도 안 묻고 따뜻한 라떼를 준다. 속이 좀 달지만 괜찮은 식사였다. 이제 감기약이랑 양말 사러 가야지....
제로니무스 수도원 안. 카메라가 벌써 꺼져가고 콧물이 주룩 흐르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아득하다. 이건 어차피 카메라에 다 담기지도 않을 거다. 기둥마다 조각이 다 다르고 정말 뭐랄까, 성스럽다는 느낌. 바티칸에서 보다 훨씬 벅차다. 고난과 역경 끝에 도착한 곳이라 그런가...... 이제 밥 먹고 약 먹어야 될 것 같은데 그냥 여기가 너무 엄청나서 나가기가 싫다. 수도원에서 나오는 길에 문 앞에서 구걸하는 노파에게 잔돈을 줬다. 왠지 계속 눈물이 났다. 딱히 동정은 아니었는데. 이것밖에 못 주는 나의 쩨쩨함이 부끄러워 서였는지 어제 참았던 눈물이 이제야 나는 건지 모르겠다. 왜 울었을까.
에그타르트를 사서 벨렘 탑에 가려는데 비가 왔다. 추적추적.... 곧 그칠 것 같긴 했는데 트램 타는 장소도 못 찾겠고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벨렘 에그타르트는 진짜 대존맛(대박존경스러운맛..) 이었다. 숙소 근처 빵집에서 먹은 에그타르트도 맛있었는데 원조는 다르긴 달랐다. 진짜 맛있다. 식어도 존맛인 거 알았으면 여섯 개 세트를 사 올걸 엉엉.... 그리고 다시 나가려고 했는데 그냥 꿀잠 자버렸다... 내 여행이니까 내 맘대로 지 뭐. 좋다. 그러다 새벽에 문득 내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캐리어 대체 어디.. 언제 만날 수 있는 것..? 그런데 엄마 아빠가 너무 평온해 보여서 뭔가 덩달아 안심이 된다.
일기를 보며 그때의 감정을 다시 떠올려 봤다. 지금도 그때처럼 약간의 감기기운이 있어서 그런가, 더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 같다. 사라진 캐리어 때문에 너무너무 불안했지만 불안해하며 숙소에 누워만 있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려던 여행을 하자. 어차피 내 손을 떠난 일을 걱정하지 말자. 스물두 살의 나는 참 용감했구나 싶다. 지금 그렇게 하라면 할 수 있을까? 나이를 먹으며 겁만 늘어버린 것 같아. 손짓발짓에 구글번역의 도움을 더해 감기약과 작은 샴푸, 양말과 속옷을 샀다. 머리를 감고 ‘비행기는 건조하니까..’ 하며 기내에 가지고 탔던 샘플 로션을 싹싹 긁어 발랐다. 하루 전의 내가 챙겨 준 로션을 바르며 현재의 나는 언제나 과거의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를 또 구하는 순간이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민낯에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길을 나섰다.
가끔 ‘아 그때 나는 그래서 울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있을 때가 있다. 대체로 그것은 또 다른 우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적었던 메모 하나에는 ‘그때에 왜 울었는지를 오늘에 알게 된 것처럼 오늘 왜 울고 있는지를 어느 날엔가 알게 될까’라고 적혀있다. 그렇지만 저 날 리스본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적선을 하며 왜 울었는지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모든 눈물이 설명될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이유가 궁금하기는 하다.
‘원조’로 유명한 벨렘지구의 에그타르트는 정말 정말 맛있었다. 에그타르트의 이데아. 완벽한 에그타르트. 그 어떤 수식어도 아깝지 않다. 포르투갈 모든 빵집의 에그타르트가 수준급이지만 벨렘의 에그타르트는 정말 많이 안 달고 맛있다. (a.k.a 한국인 최고의 디저트 칭찬)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에그타르트가 그리워진다. 에그타르트집 옆에 아이스커피 없는 유럽에서 한국인을 구원하는 스타벅스가 있는데, 에그타르트를 포장하고 아이스 카페라떼 한 잔을 사서 건너편 공원의 벤치에서 함께 먹으면 행복이란 게 어렵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입안에 행복을 채운 후에 숙소로 돌아오자 다시금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캐리어가 내일도 안 오면 어떡하지. 그래도 그냥 하나 새로 사서 여행하고 오라는 태평한 말을 하는 엄마아빠 덕분에 그래 뭐 죽기야 하겠냐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의 대화.
"엄마 옛날에 나 유럽 가서 캐리어 없어졌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았었어?"
- "너무 놀라고 걱정됐지. 그런데 뭐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안 그런 척했지."
수준급의 연기였구만. 괜찮은 척하다 보면 괜찮아지는 것들이 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