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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May 29. 2023

Day 6 : 렐루서점과 500번 버스

제발 그만해~!~!

Day 6


    아침에 눈을 떴고, 네 생각이 났다.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연락해봐도 될까. 또 너를 불편하게만 만드는 걸까. 하지만 보고 싶은걸. 좋은 거 보고 맛있는 거 먹으면 네 생각이 안 날줄 알았는데 더 보고 싶다. 망했다. 


    어제 호스텔 직원분이 추천해 준 카페에 왔다. 오는 길에 비가 많이 와서 양말이랑 신발이 다 젖었지만 확실히 예쁜 가게이긴 하다. 근데 맛은 별로.. 그리고 비싸... 점심 먹을 식당 위치 확인하고 렐루서점에 가봐야지. 포르토 대학 앞도 좀 더 걷고 싶은데 비가 그치려나 모르겠다. 아 그전에 숙소 다시 가서 양말이랑 신발 좀 갈아 신고.. 아 세상 너무 찝찝하고 거지 같다.. 아아..... 양말을 갈아 신고 나오니 비가 그쳤다. 아침의 두 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완벽했던 하루. 여행이 계속 10%씩 별로인 것 같다. 20일 여행 중 이틀간 캐리어가 없던 것부터 시작해서 리스본 성당의 노숙자나 오늘 아침에 비 맞은 것처럼.. 주로 아침에 일찍 나오면 기분 나쁜 일이 생기는 듯? 그래도 90%는 완벽한 여행이다.


    별 기대 없이 렐루서점에 갔는데 세상에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한 시간 넘게 있어버렸다. 계단 정말 너무 신기하게 예쁘고.. 원래도 서점 분위기를 좋아하는지라 최고의 공간이었다. 여기 주민이면 주말마다 올 듯. 그리고 한참 고민하다가 기념품으로 해리포터 - 죽음의 성물도 사 와버림. 이왕 사 왔으니 읽는다 아자!


    La Ricotta의 대구리조또는 짱짱 맛있었고 리스본에서 만났던 언니들을 우연히 다시 만나서 포트와인도 한잔 얻어마셨다. 으 생각보다 독한데. 그리고 나오는 길에 신트라 가는 기차랑 상 조르즈 성에서 마주쳤던 한국인 가족 분들도 마주쳤다. 지나치기만 했지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었는데 다른 도시에서 세 번째로 마주치자 아버님이 ‘자주 보는 아가씨네 허허’ 하셔서 반가웠다. 내일 프랑스로 간다고 하니 이제 못 마주치겠다고 여행 잘하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아드님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볼 때마다 이어폰을 끼고 한 발짝 뒤에 있다. 낯가림인지 중학생의 가오인지는 잘 모르겠다. 


    숙소에 책이랑 우산 놔두고 어제 가이드 V에게 추천받은 500번 버스 탑승. 아. 진짜 너무 예뻤다. 해안을 따라 쭉 달려서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 중간에 해변에 내려서 노을을 봤다. 해변이 정말 끝도 없이 길고 넓었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호카곶에 비하면 산들바람이지만..) 외투를 여미고 어딘가 이상한 핏의 모자까지 푹 눌러 덮어쓰고 노래를 들었다. 계속 앉아 있는데 노을은 점점 붉어지고 이어폰에서는 폴킴이 부른 이하이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너무 예뻤는데 왠지 눈물이 나왔다. 호카곶의 노을이 장엄한 느낌이었다면 포르토 해변의 노을은 그보다 유려하고 조용했다. 포르투갈 여행 최고의 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루이스브리지를 보러 나왔다. 원래 가려던 와인바는 닫았지만 강변에 괜찮은 곳이 또 있었다. 추천받은 달달한 와인을 마시고 반짝이는 도루 강을 보면서 일기를 쓰고 있다. 조금 춥지만 행복한 것 같다. 이제 다 썼으니 첫 잔을 마저 마시고 두 번째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나갈 거다. 씻고 일직 자야지. 내일 다섯 시 반에 택시를 예약해 뒀으니까. 이제 프랑스로 간다. 안녕 사랑스러운 포르투갈. 다시 올게. 


    와인 두 잔 마시니 적당히 신나서 숙소 들어오는 길에 엽서도 사고 추천받았던 샌드위치도 샀는데 진짜 미친 듯이 맛있었다. 있는 동안 매일매일 먹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먹다니! 일주일 지내니 겨우 샴푸통을 적시지 않고 샤워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여길 떠나야 한다. 정말 그리울 거야. 뭔지 모르게 여유로운 이 나라만의 분위기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6일 차의 일기장을 펼치자마자 든 생각은 '제발 그만해!'였다. 작작 그리워하고 청승 좀 그만 떨어! 미래의 네가 너무 부끄러워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나만 알던 일기장이니 첫 문단을 슬쩍 지워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그러면 기록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서 남겨둔다. 사초를 쓰는 사관의 심정으로....... 다행히 한국 돌아와서 연락은 안 했다. 연락을 했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이 문단을 지워버리는 쪽의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10%씩 별로인 여행에서 '그래도 90%는 완벽한 여행'이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조금 낯설다. 평소의 나는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다며 초조해하는 사람 쪽에 가까운 것 같은데. 여행지의 마법이었나 싶다. MBTI 끝자리가 P인 사람과 J인 사람의 여행계획을 비교한 사진을 본 적 있다. 나는 극 J이고 (심리학과 출신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MBTI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는 않지만) MBTI 컨텐츠를 제법 즐겨왔는데, 이상하게 그 사진에는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나의 경우, 여행 계획을 짤 때에 도시 간 교통편과 숙소를 결정하고 비행기나 기차에서 내려서 숙소에 찾아가는 길 정도만 알아두면 만사 오케이다. 도시로 이동하는 길에 그 도시에서 꼭 가고 싶은 포인트 몇 군데를 찾아 두고, 언제 어디를 갈지는 숙소에 도착해서 대강 생각해 본다. 많이 걷고, 마트에서 샌드위치와 와인을 사서 공원 벤치에서 먹는 것이 여행 일정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서울에 있을 때는 주말에 뭐 할지도 시간 단위로 계획하는데 (11:00 빨래 돌리기, 빨래 돌아가는 동안 설거지하기, 12:00 빨래 널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도 머릿속에 계획을 짜둬야 편안하다) 여행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진다. 자꾸 여행을 그리워하고 다음 여행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여행지의 마음가짐을 일상에서도 갖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여행에서만 마음 편해지는 것 치고는 돈을 너무 적게 버는 사람이라. 돈 없이도 마음 편하고 싶어요.... 


    렐루서점에서 기념으로 사 온 해리포터 원서는 몇 장 읽지 않고 오브제로 존재하다 중고거래 엔딩을 맞았지만. 안 사 왔으면 렐루서점을 떠나는 발걸음이 너무 허전했을 거라고, 그때의 나에게는 그 책이 필요했다고 정신승리해 본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 중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셔서 가족 여행을 열심히 계획하는 분이 계시는데, 한 번은 자녀분들이 '엄마 이제 그만 좀 가자'며 여행에 시큰둥하다고 속상해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포르투갈에서 만난 중학생 아드님도 그런 상태였겠지 싶다. 자녀분들이 해외여행이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 엄마 아빠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데리고 다니는 건 지 전혀 모른다고,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알겠냐고 하소연하시는데, 선생님, 그건 답이 없습니다. 나중에 본인 돈으로 여행할 때가 되어야 엄마아빠 돈으로 여행할 때가 좋았구나, 할 거예요. 엄마 아빠 돈으로 다녀왔던 스위스를 내 돈으로 가려니 손이 떨려서 못 가고 알프스는 옆 동네인 오스트리아에서 보는 걸로 타협했던 적이 있다. 그때서야 아, 예전에 스위스 갔던 게 정말 좋았던 거구나 싶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구절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간만이 알게 해주는 것이 있다.


    포르투의 500번 버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달리는 것도, 노선 중간의 해변도 모두 반짝였던 기억뿐이다. 1월의 바닷가는 꽤나 추웠는데, 추위도 아랑곳 않게 하는 풍경이었다. 나는 왜 자꾸 좋은 데서 좋은 것 보면서 우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 제발 그만해 모먼트... 다 울고 나자 이 예쁜 해변에서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유럽 여행 중 사진을 찍어줄 사람을 찾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사람 많은 관광지라면 젊은 한국인 여성 무리를 공략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포르투의 해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가기는 했는데, 내 카메라를 들고 그대로 달려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섣불리 카메라를 맡길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다시 버스를 타려던 찰나, 해변을 산책하는 노부부가 보였다. 저분들이라면 내 카메라를 들고 달리지도 않을 것 같고, 달리기 실력으로도 비벼볼 만하겠다(!)는 생각에 할아버지에게 사진을 부탁드렸다. 결과물은 참담했다. 'Where is zoom button?' 하실 때부터 풍경보다는 인물에 집중하는 타입이시라는 것을 알아챘어야 했다. 바다와 내가 함께 하는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얼굴만 화면에 가득했다는 슬픈 이야기. 


좌 : 앉아서 노래를 들었던 기둥 / 우 : 문제의 얼빡샷

    포르투갈에 다시 오겠다는 혼자만의 약속은 일 년 반 후에 지켜진다. 교환학생 기간 중 리스본에 갔었다. 일정 상 포르투는 가지 못했는데, 포르투에서의 일기를 보니 포르투에도 언젠가 꼭 다시 가리라 다짐하게 된다. 에그타르트와 샌드위치를 먹고, 포트와인을 마시고 (이번엔 두 잔이 아니라 두 병을...), 선반이라곤 없고 물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샤워실에서 샴푸통을 적시지 않고 샤워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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