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을 찾아서

노처녀 성장 소설

by 유니스 황

몇 달간 황실장으로 너무 바빴어서 음악도 못하고 지내는 날들이 마음에 걸렸다. 프로젝트 몇 개가 돌아가고 있는 와중, 지인을 통해 시나리오를 하나 받았었다. 내 음악을 들었던 한 감독이 꼭 나와 함께 작업했으면 하고 시나리오라도 읽어봐 줄 수 있는지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왔다.

시나리오를 읽어 봤다만, 로맨틱 멜로를 좋아하긴 하다만, 시나리오만으로는 설득력이 살짝 부족한 기분이었다. 내 정서에 비해 살짝 오글거리기도 하고… 거절을 할까 하다 그래도 누군가 열심히 쓴 글을 읽었으니 커피라도 한잔 하며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본 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본 후 결정하는 것이 더 좋겠다 싶었다.


내가 함께 알고 있는 그의 친구들 두 명이 설득을 위해 함께 나왔고, 해지기 전 테라스에 앉아 술을 마셨다. 역시 낮술은 늘 옳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난 70프로 설득당했다.

그나마 방송국에 일찍 취직한 그는 영화와 글쓰기를 하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늘 술을 샀다고 했다. 그러며 이젠 그의 로망이던 영화를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용기를 내어 영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베풀었으면 이제 그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꿈을 위해 도전해보는 그 무모한 용기를 왠지 지지해주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 음악이 들어가면 그 영화가 좀 더 괜찮아질 거라는 느낌은 있었기에 함께 하기로 했다.


진행되던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8월부턴 영화 음악을 위한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다시 아티스트 유니스 황 모드로 돌아가기 위해 리프레쉬를 위한 여러 전시도 몰아보고, 한참 못 읽던 책들도 읽고, 다시 운동도 했다.


슬픈 테마는 금방 썼는데 풋풋한 설렘의 음악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설렘에 관한 이야기인데, 시나리오와 콘티를 아무리 봐도 별로 설레지가 않았다. 설레어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산들바람과 초록숲 그리고 낯선이들을 만나면 좀 설레는 마음이 생길까 싶어 모르는 분들과의 첫 등산을 신청했다만, 어마무시한 오르막에 여러 봉우리들을 완주하는 상급자 코스를 가 땀만 한 바가지 흘리고 퐈이팅만 넘치는 날이었다. 계속 군가 같은 돌격의 힘찬 음악만 맴돌았다.

전시도 때마침 유령신부 팀 버튼과 놀란 감독에게 영감을 주었던 퀘이형제전이었다. 꿈에 볼까 무서운 인형들, 열린 뇌와 벌레들의 그로테스크한 어둠의 향연이라 공포영화에 딱 좋은 느낌이었다.

몇 권 읽은 책들은 매우 건강하고 명랑했다. 달달함을 위해 몰아본 한국 드라마에서는 백마 탄 왕이 광화문을 달리고 있었고, 김고은은 여전히 도깨비에 있는 듯한 연기를 하고 있었으며, 음악 또한 도깨비랑 너무 똑같아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지가, 설레어본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았다. 설렘을 노팅힐이나 러브 액츄얼리, 성시경 노래들로 채우고 산지 오래였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기로 해, 요즘 가봐야지 했던 삼성동의 와인 마시기 좋은 식당에 갔다. 늘 와인 한 병은 부족하고 각 1병은 살짝 많지만, 결국 각 1병 이상을 마시게 된다. 조금 절제의 미를 보이려 애피타이저로 글래스 샤도네이 한잔을 마신 후 레드 한 병을 마시기로 했다.

아늑한 분위기도 좋았지만 예쁜 식기들, 특히 어지간한 콜키지 식당에서는 늘 아쉬운 와인잔들이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요즘 와인잔에도 관심이 많아져 집에 있는 잔도 리델로 바꿨는데, 이 브랜드는 잘토인 것 같았다.

소믈리에가 따라준 샤도네이를 마시려고 잔을 드는 순간이었다. 여리여리 가늘고 기다란 와인잔을 드는 그 순간, 와인잔의 무게가 가느다란 스템(와인잔 목부분)에서 손끝으로 전달되는 그 순간, 문득 떨렸다. 가늘고 아찔한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뒷모습같이 매력적인 그 느낌이, 건배도 조심스러운 얇은 크리스탈의 느낌이, 새콤하게 기분 좋은 샤도네이의 그 향이, 나를 설레게 했다.


역시 그토록 찾으려는 파랑새는 집안에 있었고,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 밤, 나는 그렇게 설레었으며 잘토 잔을 하나 사야 하나 생각했다.

IMG_2784.jpg 나를 설레게 했던 첫 찬, 첫 모금
IMG_2829.JPG 이렇게 마시고도 2차 가서 한 병을 더 마셨던 날. 첫 잔의 설렘 때문이었을 거야~^^


P.S 관계자가 보면 꽤 뿌듯해하실 글이겠고 뭔가 와인잔 홍보글 같기도 하다만, 잘토나 레스토랑에서 어떠한 것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쓴 글입니당.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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