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처녀 성장 소설
며칠 전, 언니네 집에 갔다가 책장 위에 세워져 있는 사진을 봤다. 한 7년 전쯤인가, 홍콩에서 찍었던 사진이다.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고 7년 동안 숨겨져 있던 사진.
그때 언니는 늙으신 시아버지의 병수발에 치매 수발까지 오래 하다 보니 너무 지쳐있었다. 힘든 언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언니네 동네로 이사 와서는 함께 언니네 시아버님과 조카들을 챙기며 나조차 며느리 스트레스와 주부 스트레스가 생겼으니, 오랜 세월을 지냈던 언니는 오죽했을까.
잠깐잠깐 나가서 하는 학원 수업과 밤에 함께 마시는 맥주 정도가 언니의 낙이었던 그 시간.
난 형부에게 며칠의 휴가를 허락받아 언니와의 여행을 계획했다. 물론 치매를 앓고 계신 시아버지, 한창 손이 많이 가는 두 아들, 그리고 운영하는 학원을 놓고 며칠을 비우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언니의 노고를 아는 형부가 며칠간 집을 책임지기로 하고 허락해줬다. 단, 형부 혼자만 알고 모두에게 비밀이라는 조건으로.
혹여나 조카들이라도 사실을 알면 여기저기 이야기가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고, 아픈 시아버지를 놓고 며느리가 해외여행이나 갔다는 말을 듣기는 뭔가 억울한 사정이었으니, 아예 말이 나오지 않게 다녀오라는 조건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힘든 언니를 위해 유니스 여행사를 가동해 우리가 좋아할 만한 일정을 계획해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왔었다. 언니와 단둘이 하는 첫 해외여행이었고, 언닌 정말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우린 가지고 있던 모든 걱정과 짐들을 잠시나마 다 지우고 그 순간을 만끽했으며, 정말 많이 웃었고 사소한 모든 것에 행복해했었다.
단 한 가지, 혹시나 생길지 모를 비밀 유출을 걱정해 함께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다. 절대 홍콩인줄 알아보지 못하게 찍은 셀카 두어 장과 관광지 사진 알바가 찍어준 둘이 찍은 사진 한 장뿐.
한창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지만 난 홍콩에 누구와 갔는지 밝히지 못해 독사진만 몇 장 올렸고, 혹시나 내가 셀카를 찍을 때 언니가 프레임에 잡힐까 많은 신경을 썼으며, 언닌 찍었던 사진을 몰래 간직해야 했다. 관광지 사진 알바가 찍어 허름한 종이 액자에 넣어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언니에게 기념으로 주었지만, 그 역시 다른 사진들과 함께 어둠 속에 오랫동안 숨어있다가 얼마 전 광명을 찾은 것이다.
이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린 몰랐는데 이모랑 언제 홍콩 다녀왔어요?’라고 묻는 조카들에게도 ‘예전에..’라는 말로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만큼 잘 지나왔다.
우린 다시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분명 더 나아진 상황이긴 하지만 또 다른 많은 문제와 짐들을 안고. 어쩌면 그때보다 더 아플지도 모를 많은 문제들을 안고.
희귀 난치 환자 등록이 된 아픈 언니는 혹시 나에게 짐이 될까, 학원 수업 이외에도 아침마다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하며 체력을 끌어올렸다고 했다. 걷기를 좋아하는 난 언니에게 너무 무리한 일정이 될까, 동선을 최대한으로 줄이며 나에게는 조금 느릴만한 계획을 세웠다.
언니가 진짜 좋아할 만한 장소들과 좋아할 만한 맛집들을 열심히 검색했고, 무지 신나 할 언니의 표정을 떠올리며 행복해졌다. 이젠 알콜 섭취는 치명적 위험이 되었기에, 언니를 위해 여행 계획을 짜며 제일 먼저 찾아본 게 일본의 무알콜 맥주 판매처였다. 다행히 편의점에서도 다양하고 맛있는 무알콜 맥주를 팔고 있어 어찌나 고맙던지.
지금을 즐겁게 살고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 매번 ‘다음에, 다음에 여유 있을 때...’라고 미루던 일을 감행한다. 별로 갈만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님에도, 나중이 아닌 지금을 살기 위해 난 언니에게 무조건 갈 것을 제안하며 덜컥 저질렀다.
아마 언닌 여전히 불편한 마음으로 출발할 테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서로의 마음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힘든 이야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밝은 곳으로 나오게 되는 그런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힘든 기억들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하게 해주는 시간의 힘을 믿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걱정을 내려놓고 그 순간을 충분히 누리려 한다.
어쩌면, 다음은 쉽지 않다. 바라던 다음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려 한다.
Carpe diem~!
p.s 코로나 시대라 이동도 쉽지 않은 요즘, 그렇게 다시 훌쩍 떠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길 바라며 몇 년 전에 썼던 글을 정리해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