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상처는 자연히 잊히지만, 큰 상처는 강제로 잊어야 하기도 한다
피부에 상처가 났을 때 붉은 피는 피부 밖으로 흘러 상처가 균에 오염되지 않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 피는 서로 엉키어 딱딱하고 거므스루한 딱지가 되어 피부를 덮는다.
덮인 딱지 아래 새살이 돋을 때까지 우리는 잠시나마 아픔을 잊는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딱지 아래 아픔을 잊을만하면 자연스레 딱지는 떨어지게 된다.
아픔은 더 이상 아픔이 아닌 채로 살아간다.
어설프게 새살이 나고 좀 더 이른 때에 딱지가 떨어지면 아물지 않은 상처부위의
덜 단단한 새살이 다시 아프게 한다.
모름지기 상처가 났을 때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 시간은 우리에게 딱지라는 망각을 선물로 준다.
그리고 새로운 살이 날 때까지 상처를 잊게 해준다.
그렇게 아픔은 잊히기 마련이다.
다시 상처를 들춰봐도 아프지 않을 때,
나의 새살을 가만히 어루만져주자.
그때의 고통을 잊어내느라 고생했다고.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최영미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밟는다는 건
웃고 떠들고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 남자를 보낸다는 건
뚜뚜 사랑이 유산되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는 건
편지지 갈피가 해질 때까지 줄을 맞춰가며 그렇게 또 한 시절을 접는다는 건
비 갠 하늘에 물감 번지듯 피어나는 구름을 보며 한 때의 소나기를 잊는다는 건
낯익은 골목과 길모퉁이, 등 너머로 덮쳐오는 그림자를 지운다는 건
한 세계를 버리고 또 한 세계에 몸을 맡기기 전에 초초해진다는 건
논리를 넘어 시를 넘어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잡념처럼 아무 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뭉갠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