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는 자기 돌봄... 4. 새벽에 본 지난 일기장
”일기는 일시정지, 괄호, 멈춤이다. 한 페이지에 던져진 몇 개의 단어로 자기 자신을 고립하는 것은 나날을 쓸어버리는 망각에 저항해 그것을 기록하면서 싸우는 것이다 “ (<내면일기> 소피 퓌자스)
그 겨울날의 새벽이 떠오릅니다.
3년 가까이 계속된 엄마의 간병으로 마음이 더 추웠던 어느 날이었어요. 코로나가 극성인 시절, 아이의 피말리는 대학 입시가 끝나기가 무섭게 팔순의 엄마가 예후가 좋지않은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삶은 때때로 꽤나 잔인합니다. 지옥같던 입시의 여운이 가시기도전에 엄마와의 이별이 다가오고있었습니다. 아이의 입시가 끝나면, 엄마가 좋아하는 바다에 같이 여행을 가려했던 나의 작고소박한 꿈도 함께 멀어지고있었고요. 그렇게 엄마는 입원과 수술과 항암을 이어갔고, 슬프고 힘든 마음 속에서 햇수를 거듭하는 간병까지 계속되면서 심신이 모두 지쳐만 갔습니다.
불면의 밤이 왔습니다. 왕복 세 시간 넘는 친정집에 다녀오는 날엔, 병수발과 집안일등으로 몸이 고단한데도 여러 걱정과 상념으로 자다깨기가 일쑤였습니다. 새벽에 눈이 떠졌습니다. 식구들도, 같이 사는 고양이도 깊이 잠든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은 아직 오지 않았고, 창밖은 어둑했습니다. 마음은 지쳤는데 , 위로는 멀어 보였습니다.
그때, 뜻밖에도 일기장이 생각났습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노트북에 저장된 지난 일기들을 조용히 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패혈증이 왔을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일기장입니다. 그 일기장은 아이의 사춘기와 입시, 남편이 아팠을때, 나의 갱년기, 엄마의 암판정, 이어진 간병의 고단함등이 고스란히 기록되어있는 나의 보물입니다. 30년 가까이 적은 꽤 많은 분량이기도 하고요. 노트북에 여러개의 파일로 나뉘어 저장되어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세월들이었지만, 내가 살아온 흔적들이 모두 담겨있다고 말할수있습니다. 찬찬히 나의 지난 시간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몇 페이지나 읽었을까요.
어슴푸레해진 새벽에 잔잔한 희열이 번져나갔습니다.
두 가지가 또렷해졌습니다.
그 당시에 힘들게 느껴졌던 일과 감정들이 다시 보니 ‘별거 아니었구나, 그냥 지나가는 감정이었구나’, 싶은 마음이 하나였습니다. 또, ‘이런 힘든 일들을 잘 이겨냈구나’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대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 지나가는 일들이구나', 하는 감정은 나를 현재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잘 해내고 이겨냈구나' 하는 감정은 나를 지지해준다고 느꼈습니다. 그 겨울의 새벽에 엉클어진 내 마음이 가지런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새벽, 오래된 일기장이 건넨 건 속 깊은 위로였습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따듯하고 다정한 지지와 응원이었고요. 다시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고, 간병의 고단함도 덜어진건 물론이고요.
그날이 꽤 강렬한 경험이었지만,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패혈증과 우울증에 걸려서 힘들어하던 때 써두었던 일기를 훗날 다시 본 적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힘들어했는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했습니다. 그 감정들이 틀렸거나 잘못된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다시 들여다보니, 객관적인 입장에서 나를 볼수있었고, 그때의 나는 이런걸로 힘들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나를 조금은 안스러운 눈길로 바라볼수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나를 힘들게 하던 감정들과 좋은 이별을 할수있었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는 한강작가의 말이 다시한번 생각났습니다. 어느날 꾼 꿈으로부터 다음 작품이 시작되었다는 작가는 과거가 의미없이 지나가버리는 시간이 아니었다고 증언합니다.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않는다>는 몇년전 꿈에서 실마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이었다. 벌판가득 수천수만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있고, 하나하나의 나무뒤쪽마다 무덤의 봉분들이 있었다..." 몇년후 작가는 소설을 집필하고,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듯하다"고 공책에 적습니다.<한강작가 '노벨상 강연문 중에서>
“기억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과거를 붙잡기 위한 게 아니고” ( 이인아교수, 서울대 뇌인지과학과). 다 밝혀지진않은 뇌의 비밀에 과거는 지나가버린 시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단서들이 보인입니다. “기억은 단순한 저장이 아니다. 뇌의 해마는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시뮬레이션해서, 최적의 선택을 만든다” 최근에 관심이 있어 다녀온, 뇌과학저서 <기억의 미래> 북토크에서 인상깊었던 대목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들을 일기로 기록해 놓은 것은 과거를 붙잡기 위한 게 아니었구나, 다시 오지 않을 하루하루를 잊지 않고 기억한 건, 내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는 걸, 지난 일기를 다시 보면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위로하고 , 나와 연결되는 마음이었다는 걸, 무심해 보이는 빛바랜 글자들을 보고 알았습니다. 다시 보는 일이 치유가 된다는 것도, 일기장을 보면서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일기장을 자주 들춰봅니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 조용히 지난 일기장을 펴듭니다. '이런 일들로, 고민했구나' ' 이런 게 즐거웠구나',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다 보면, 내가 숲을 닮은 사람인지, 바다를 닮은 사람인지 알게 되고, 고민들은 몇 그램 더 가벼워집니다. 불안했던 마음은 가라앉고, 정처없이 떠돌던 마음은 현재로 돌아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당연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더 커지고, 닥친일 들은 다룰만한 크기로 작아집니다.
지난 일기를 다시 보면 마음이 한 뼘 더 자라납니다.
**이하 브런치북 연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