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콩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얻은 땅콩 한봉지도 열어보지도 않고 버렸었다. 근데 어제저녁 늦게 또 가져왔다. 볶은 것도 싫어하는데 이번에는 아예 껍질도 까지 않은 생땅콩이었다. 그녀는 늘 이웃에서 얻었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을내 취향은 물어보지도 않고 떠넘기다시피 건네주었다.
다음 날, 시꺼먼 봉투에 제법 묵직한 땅콩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다가 유튜브를 통해 접한 저 먼먼 나라에서 먹을 게 없어 나무에 붙은 흙을 떼어먹는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음식 버리는 걸 싫어하고 좀처럼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내가 스스로 구매하지 않은 음식을 버리면서 죄책감을 가지는 게 억울했지만 다시 끄집어내서 주방 한 켠에 미니 절구를 이용해 껍질을 타격해 보았다. 예상외로 경쾌한 한방에 껍질이 벌어지고 후줄근하고 시들한 껍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오동통하고 건실한 땅콩알 두 개씩을 얻을 수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어제 굵은 빗줄기 뒤에 쨍한 하늘, 창문 한 짝씩을 열어도 찬 기운이 크게 느껴지지 않아 봄이 예견된 날씨였다.
콩 찌익 쫙 톡톡......
거의 한 시간 가까이땅콩 까는 재미에 푹 빠졌다. 껍질이 시든 것은 두 번 타격을 해야 벌어졌지만 자칫 힘조절에 실패하면 안에 콩이 박살이 나버렸다. 몇 번 실수를 한 후에야 콩도 사람을 대하듯 해야 함을 느꼈다. 겉만 보고 절대 판단할 수 없는.... 겉은 노랗고 상처 없이 깨끗했지만 속은 까맣게 썩어있는가 하면 너무 말라 있어서 안이 썩었을 것 같은데 정반대로 엄청 실한 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절구를 사서 깨만 갈아 쓰면서 과소비했나 싶음에 억울했었는데 땅콩까는데 너무도 요긴하게 썼다.
잘 안 벌어지는 것들은 속콩을 보호하기 위해 까칠한 껍질을 맨손으로 깠더니 나중엔 양 엄지 검지 손가락이 아렸다. 예상보다 썩은 콩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잘못 본 것에 약이 올랐다. 믿은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랄까?
프라이팬을 이용해 콩볶기에도 도전했다. 애써 깠으니 꼭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간 재래시장에서 땅콩을 볶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넓적한 무쇠 펜 위에자동 십자 모양의 막대가 쉬지 않고 빙글빙글 돌며 젓고 있었다. 대신 나는 콩이 익을 때까지 쉼 없이 저어야했다. 한참을 젓다보니어느 순간 수분이 다 날아간 느낌, 땅콩의 무게감이 굉장히 가벼워졌다. 불을 끄고 식을 때를 기다렸다.몇 번이나 바스락 소리내며 껍질이 분리되는 순간을 느껴보고 싶었지만 너무 뜨거워서 잡을 수가 없었다.식을 때까지 또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