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엣지정 Aug 24. 2021

내 집을 여행하는 법

춘천 살이

1, 내 집을 여행하는 법


지난해 5월에 춘천으로 이사를 했다.

대면 업무 비중이 컸던 나는 코로나로 집에 머무는 동안 책을 읽거나 웹서핑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예측하는 정보는 넘쳐났고, 그중에서도 건축, 특히 주거환경의 변화를 다룬 콘텐츠들을 눈여겨보았다.

집은 출장이 잦았던 사회 초년 시절부터 여행을 할 때마다 늘 큰 관심사였다. 캐리어 하나로 몇 달을 살 수 있는데, 꼭 한 곳에 머물 필요가 있을까? 비단 게르(Ger)나 노매드(Nomad)까진 아니더라도 세상은 넓었다.

천성이 게으르고 자연이나 사물,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내게 한시적인 여행은 그저 먹고 쉬는 휴양 정도였고, 한 달은 살아봐야 그곳을 여행했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이후 "제주 한 달 살아보기"식의 여행 프로그램이 등장했을 때 난 이미 "몇 년 살아보기"로 버킷리스트를 수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레이어드 홈(Layered Home)"!

집의 기능이 분화되거나 중첩되면서 크기와 구조가 변하기도 하고, 아예 업무와 휴식을 분리해 도시와 근교에 두 개의 집을 갖는 게 트렌드가 될 거란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 같았다.

춘천은 딸이 3년째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다. 기숙사 입퇴사 때마다 오고 가서 낯설지 않았다. 그보다 더 예전, 한 남자와 비가 오면 불쑥 찾아 사랑을 속삭였던 곳, 같이 살아보자 한 곳이다. 물이 부족한 내 사주에도 잘 맞는 호반의 도시, 춘천. 내 꿈의 여행지로 금상첨화인 도시였다.


서울에서 나흘이나 닷새, 춘천에서 이틀이나 사흘. 일주일에 한두 번 경춘로를 운전하며 거대한 풍광 속에 한없이 작은 나를 바라본다. 새삼 허무감에 빠진다. 내 삶을 치밀하게 묘사해본 적이 없어 헛 것이란 느낌이 드는 걸까? 노트를 사서 제목을 달았다. 독후감 노트, 영화 노트, 고전 공부/경전공부 노트, 문장 수집노트, 여행노트.... 이 복된 삶도 한순간 한 부분을 치열하게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진리와 불안 앞에 섰다.


늦은 봄에 와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통과해서 겨울에 들었다. 눈동자 색깔이 같고 같은 언어를 쓰는 옆집 할머니가 늙은 호박을 깎아 우리 담도 되는 벽 아래 줄줄이 널어두었다. 알면서도 묻는다.

"호박이에요? 채소밭은 언제 다 정리하셨어요?"


처음엔 전화번호도 없이 사나흘씩 집 앞에 세워둔 차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런 무식한 촌뜨기를 봤나?'

차 앞에다 큼직하게 써서 붙였다.

'대문 앞에 외부차를 세우지 마시오.'

차주는 함흥차사인데 앞집 아저씨가 한마디 한다.

"여기 네 땅 내 땅이 어딨어요? 단지 당신 집 대문 앞이란 것뿐이지'"

까칠한 이방인이 대대로 살아온 현지인에게 덕 볼 일이 뭐가 있을까?.......


현관문만 열면 마주치는 이웃과 인사를 나눠본 게 얼마만인가? 그들의 사계절을 내 삶에 녹여낸 춘천살이를 적어보리라. 한 발 짝 더 다가서 보자. 익숙한 것도 낯선 것을 대하듯 봐보자.


춘천방송국 주파수를 타고 BTS의 <내 방을 여행하는 법>이 흘러나온다.

떠나고파 anyway/뭐 방법이 없어/이 방이 내 전부/그럼 뭐 여길 내 세상으로 바꿔보지 뭐/시선을 낮추고 어디든지 막 zoom/여기가 이랬나 싶어/괜히 추억에 잠겨/오래된 책상도 달라진 햇빛도 특별해 보이네/떠나볼까 Let me fly to my.


 2. 베란다 사용법


반만 가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으로 베란다 차양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고 투덜대는 딸을 보며 나는 딴생각을 한다.

'저 빗물로 시원하게 청소하면 딱인데.....'

건평의 1/3은 족히 되는 크기의 베란다는 집을 얻을 때 가장 나를 유혹한 공간이었지만, 온통 노란 솔가루로 뒤덮여있는 초록색 방수 바닥은 꽤나 심난스러운 숙제이기도 했다. 한 날 한 시에 같은 업자가 설치를 했는지 온 동네가 아크릴 패널 지붕을 덮고 있었다.


90년대 초, 서울 와서 처음 세 들어 살았던 홍은동 언덕 구식 가옥에도 천막을 설치했었다. 방에 비해 큰 창은 건너집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작업실을 겸했던 공간에 창문만이라도 고급진 카페 분위기로 연출해 볼 심산이었다. 그때도 아쉬움은 있었다. 군 막사에나 쓸 법한 두꺼운 천 소재는 빗소리도 삼켜 둔탁한 음을 냈고, 해를 가려 실내를 어두침침하게 만들어버렸다.

차양의 폐해는 또 있었다. 하늘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것. 내 집에서 불과 10여 분 거리에 있는 오월리 친구는 '별'로 샤워를 하며 와인을 마신다고 자랑하곤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도 별을 보는 건 춘천에서라면 당연히 누릴 호사라 생각했다.


우리가 잠을 설치는 건 비가 오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까마귀가 많고 참새도 떼로 몰려다니니, 그 울음소리는 가히 소음이었다. 서울 한 복판 어디서 우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매미소리도 거슬렸는데, 이 집 저 집 감나무마다 붙어 있는 그들의 목청은 성능 좋은 앰프를 연결해둔 듯 웅장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앞집 옆집 아랫집 뒷집 윗집 어디랄 것도 없이 해 뜨기가 무섭게 일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서걱거리는 플라스틱 술이 달린 비질 소리, 바가지로 물퍼는 소리, 화단에 쫘악 끼얹는 소리, 수돗가에서 뭔가를 씻어대는 소리 등등은 마치 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온 동네 대문이 우리 집 대문 여닫는 소리로 들렸다.


펜데믹 시대는 인간이 지구와 자연을 훼손한 결과이기도 하다고, 에어컨 없이 살면서 지구사랑에 앞장서 보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니 5월 중순부터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홍천으로 자원봉사 가는 딸을 시외버스터미널로 데려다주면서 서울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뿌연 하늘을 불평했다.

"춘천의 아침은 원래 이래요. 그래도 곧 쨍한 하늘이 보일걸요?"딸이 확신에 차서 말을 한다. 역시나 서울은 스모그고 춘천은 물안개였다. 딸 말이 못 미더워 이불 빨래를 뒤로 미뤘다면 후회할 뻔한 날씨가 불과 한 시간도 못 가서 펼쳐졌다. 설령 소나기가 쏟아진대도 차양이 있으니 문제없다.


오늘은 베란다에 나가 그림을 그리자.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꾸 웃음이 난다.


3. 안나 이야기


영어 안나윤'으로 문자가 하나 떴다.

바코드를 포함한 A마트 30% 할인 쿠폰이었다.

눈에 익은 이미지였지만 5년도 넘어 대하는 그녀의 이름이 되레 낯설었다.

춘천에다 막 이삿짐을 풀었을 때였다.


H백화점 킨텍스점은 2012년만 해도 고양시 일산 호수로 허허벌판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듬해 2월, 상암에서 경기도 파주 신도시까지 '제2자유로'가 개통되었고, 상암지구에서 다리 하나 건너편에 살았던 나는 엄청난 인프라를 선물 받았다. 덕분에 통일동산, 영어마을. 헤이리 예술마을. 출판도시. 프로방스. L과 S사의 아웃렛몰까지 다양한 핫플레이스를 누볐고, 집에서 주차까지 20분 거리의 H백화점 문화센터에 강좌도 두 개 등록했다. 안나는 여행 회화반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거기서 결혼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30년을 살았다. 150센티 키에 40킬로그램이나 될까 한 체형, 표정에서 말투까지 일본인에 가까웠던 그녀와 내가 친분이 생긴 건 크리스마스 홈파티에 초대를 받으면서였다.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그녀가 일본에서 요식업을 했다는 건 엄청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개인사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해갔다.

딸의 예기치 않은 상급 학교 진학으로 이사를 하면서 소원해지기 전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꿈을 함께 키워갔다.


그녀가 영어회화 반원들에게 간혹 보내줬던 거지만 그날 문자는 누가 봐도 오류 메시지였다. 하지만 아득한 곳, 망망대해 춘천이란 낯선 곳에 이사한 첫날 날아든 친구의 문자는 따뜻한 생명줄만큼이나 반가운 거였다.

"안나?"

"실비아?"

그녀도 내 이름을 불렀다.

"잘 지냈어? 잘못 보낸 문자야. 호호호~ 그래도 이렇게 연락이 닿으니 너무 반갑다."

"그러게. 일산에 있는 거야? 난 지금 춘천이야."

"어머 머머~. 나도 춘천인데?"

그녀의 몸짓과 표정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내 문자가 넘어가기도 전에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춘천댁으로 3년! 그녀가 나와 고작 10여 분 거리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그녀와 나는 모든 걸 내팽개치고 가장 빨리 접선할 수 있도록 똑같은 거리를 두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나는 그녀가 미치도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떠나야 만난다더니...

늘 기대하고 떠나라더니...


4. 이사 여행


춘천으로 가자."결심이 선 날. 인터넷으로 춘천 소재 부동산 업자를 섭외하고 이틀 뒤에 만났다.

서울로 왕래하기 편하고 딸 학교 근처 안전하고 조용한 곳으로 부탁했더니, 대부분 1층 현관부터 잠금장치가 된 10평 내외의 작은 빌라들을 보여주었다. 어둑해지자 다급한 마음에 본 것 중에 그나마 제일 나은 집을 선택하려는데, 내가 덜 내켜한다는 걸 느꼈는지 단독주택을 하나 보겠냐고 제안했다.


코로나 발생 석 달 전. 사무실 근처 조그만 오피스텔에 <休心庭園>이란 간판으로 힐링카페를 오픈했다. 하던 일과 연계해서 각종 놀이와 감상, 토론 및 상담, 읽기와 쓰기, 요리와 식사를 할 수 있는 공동체 공간을 만들어 볼 심산이었다. 2년 기한으로 운영하면서 뜻이 모아지면 지방으로 확장 이전할 생각이었는데 허망하게도 시도조차 못해본 것이다.

나는 마지막에 본 주택을 마치 <휴심정원> 지방 분점을 계약하듯 해버렸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엄마는 집을 사라고 성화였고, 몇 년 후 내가 세 살던 집이 IMF로 싼 값에 나와 번거로움 없이 사긴 했지만, 나는 애초 집을 소유할 뜻이 없었다.

한 직업에 10년 이상 종사하지 말고 3년마다 이사 다니며 살자는, 다소 비현실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뭘 잘하는지도 모르는데 한 번 택한 일에 평생을 바치는 건 비생산적이고, 지리나 건물 풍수를 믿다 보니 한 곳에서 주야장천 사는 것도 합리적이지 못한 거였다.

무엇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다는 것! 가능한 많이 경험해보고 싶었다.


어느 날 우연히 주민센터에서 어르신 한 분이 직원에게 "내가 이 동네 몇 년 산 줄 아느냐?" 고래고래 고함치며 갑질 하는 걸 본 순간, 육아로 깊이 잠자고 있던 내 생각에 파문이 일었다.

돌아보니 나도 이미 동네 대중목욕탕과 시장, 하물며 새로 이사 오는 낯선 이웃들에게 빈번히 터줏대감 꼰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가장 우려했던 내 모습이었다. 마침 딸이 특수고등학교를 가게 되면서 15년 동안 머물렀던 동네를 떠나 이사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짐을 싸고 준비하는 동안 뒤숭숭하게 쫓기는 느낌과 낯선 곳에 대한 공포감. 여행을 할 때나 이사할 때 나를 옥죄는 그 상황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금방 안정되고 익숙해지는 게 두려웠다. 편안해지면 곧 게을러졌다. 짐을 싸면 주변이 정리되고 내가 추슬러진다.


이번 이사 여행은 거처가 주택이다 보니 덤으로 이웃이 생겼다. 이웃을 잘 만나는 건 복 중에 복이다. 여차하면 이웃 때문에 낭패 보는 세상이니 말이다.

나의 집 아래채에는 70대 중반의 대감님과 60대 후반의 마님이 40년째 살고 계신다.

나를 들이기 전 입주를 원하는 여러 명을 보이콧하셨다고 한다. 아들 둘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는 작은 아이 학교 앞으로 이사한 것이 보이콧 이유였다. 공부는 고등학생인 큰 아이가 더 급하니 큰아이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마님보다 연세가 많은 내외분도 보이콧했다는데, 지금까지 양가 어른들 모시느라 애쓴 아내가 또 어른을 모시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기피하다 보니 한동안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단다.

내가 계약하던 날, 간밤 대감님은 선몽을 하셨는데 마님과 죽이 잘 맞는 사람이 딸을 데리고 온다고 했단다. 마님은 내가 <휴심정원>을 춘천에서 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오랜 세월 기업체 식당을 하셨고 지금도 소방서 직원들의 식사를 해주고 계신다. 우리는 만나면 요리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더 기가 막힌 건, 내게 끝까지 최선을 다해준 부동산 젊은이의 아버지는 우리 대감님이 응급실로 모신 덕분에 여태 살아계신다고 하니, 어찌 사람의 인연이 멀리 있다 할까?(살면서 나는 우리 집주와 중개인 집안과의 더 엄청난 얘기를 들었고 그 젊은이는 내 중개를 끝으로 부동산업을 그만두고 집안 대대로 이어오던 닭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떠나지 않으면 기회는 없다.

나이를 먹어가니 공연히 마음이 바빠진다.


5. 겨우살이


날이 흐려 시간 파악이 안 되는 바람에 조금 늦게까지 잤다. 입춘이 지난 탓인지 날이 엄청 푸근해졌다. 간밤에 시작된 눈은 아직 내리고 있었다.

작년에는 한 번도 안 오더니 올해는 기습적인 폭설로 몇 번이나 간담까지 서늘하게 만들고 있다. 눈이 얼어붙지만 않으면 도로나 차가 지저분해지더라도 운치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는 순간 차든 도보든 사람이 다치는 사고와 직결되니 긴장할 수밖에 없다.


눈이 오면 온 동네 사람들이 아침 일찍 나와 눈을 치운다. 눈이 내리고 있어도 적설량이 어느 정도 되면 모두 나온다. 쓸어낸 눈은 자기 집 대문 앞 벽에 높게 쌓는다. 집집마다 모두 같은 장비-대가 긴 플라스틱 빗자루, 초록색 플라스틱 넙적 삽과 넉가래-를 구비하고 있어 거의 동일한 양의 노동을 한다.

한 번은 샵으로 바닥을 쓰는 소리가 요란하고 부담스러워 장갑에 모자까지 무장을 하고 내려갔다가 아랫집 터줏대감에게 가차 없이 쫓겨났다. 이방인에 대한 배려 덕분에 점심 무렵 해가 중천에 뜨면 그제야 집 앞에 세워둔 내 차에 폭닥하게 덮인 눈만 쓸어내리는 얌체족이 되었다.


그래도 햇볕엔 취약해서 양지에 쌓인 것은 잘 녹고, 지붕 위에 얼음덩이로 변한 것들도 그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우면 사정없이 떨어져 내린다. 3층 옥상 차양에 쌓인 눈덩이는 2층 테라스 차양을 찍고 1층 마당이나 또 다른 차양으로 엄청난 굉음을 내며 떨어진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듣고 보기 어려운 짜릿한 시청각 경험이지만 자칫 사람이 다칠까 봐 가슴을 졸여야 한다.


"보일러를 16도에 맞춰 두고 오긴 했는데, 서울 아파트들도 보일러가 터져서 난리예요."

춘천집을 비운 지 열흘째 되던 날, 기상청에서 본 그날의 춘천은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고 예보되어 있어 마님께 전화를 했다.

"춘천은 괜찮아."

40년을 살아오신 분이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었지만 다음 날 나는 춘천으로 향했다. 수도관이 혹여라도 동파되면 내 집 문제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미 봄이 가까이 와 있었다.


실내 온도가 특별한 난방 기구 없이 20도까지 오르던 날, 운동 기구를 내어 놓은 테라스로 나갔다. 손잡이만 대충 닦아내고 러닝머신 위를 걸으며 기분 좋은 땀을 흘렸다. 거기까진 좋았다.

겨우내 창문 틈 구석구석 쌓인 먼지가 눈에 들어왔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청소용 호스를 연결해서 물청소를 시작했다.

아뿔싸. 너무 이른 봄 준비였다. 해 떨어지기가 무섭게 테라스 바닥 곳곳이 껑껑 얼어붙었고, 그 보다 씻겨 내려간 물이 1층으로 향해 있던 몇 개의 하수관을 통해 아랫집 마당으로 흘러가 거기까지 다 얼어붙어버린 것이다.

그 얼음이 녹을 때까지 누구라도 미끄러지실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던지...

나의 춘천 살이 시행착오는 당분간 계속되리라.


6. 이웃사촌


늦은 밤 모르는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차를 좀 빼 달란다. 전화번호도 없이 한 달째 집 앞 대문을 떡하니 막고 있는 아반떼 차량 때문에 2층으로 올라오는 출입문까지 막고 주차해놓은 상태였다.

"저는 제 집 대문 막고 주차해놨는데요?"

1년을 넘게 왔다 갔다 했으니 애지 간하면 거주자 차인지도 알 텐데 싶었지만,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싹수없는 이방인 취급받기 싫어서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갔다. 바로 옆집 3세대가 사는 집 대문 앞에 주차금지 안내봉까지 치우고 차를 세우고는 전화도 안 받는다고 했다. 그 집 앞을 조금이라도 걸쳐 있는 내가 차를 빼려니까 노인네가 나서서 말렸지만 아들 내외와 손자는 계속 주차자리를 두고 투덜거리며 은근히 나를 압박하는 듯했다.

통화가 안된다는 번호로 전화를 했다. 한참 만에야 남자가 받았다. 그도 건너편 집에서 나왔는데 동네 사람들 말대로라면 설령 내 집 대문 앞이라 해도 내 땅은 아니니 그도 권리가 있는데 옆집 노인네가 호통을 치듯 차를 빼라고 했다. 그도 나 같은 마음이었는지 무슨 말을 하려다 차를 빼주었다. 주차는 해결이 됐다. 그들의 차가 자기들이 원하는 자리에 안착하는 걸 보고 어정쩡해지는 틈을 타

"저는 올라갈게요. 쉬셔요."인사를 했다. 그제야 며느리도 아들도 인사를 받았다.


다음날 옆 집 노인이 허리에 보호대를 두른 채 마당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어제 서울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얼떨결에 들은 듯해서 아는 척을 했다. 항아리를 옮기다 넘어져 몇 개월째 고생하고 있는 얘기를 시작으로 텃밭 가꾸는 일까지 20여 분은 족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햇빛이 따가웠지만 최대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 눈을 맞추며 응수를 했다.

노인들에겐 속병 나는 것보다 골절이 훨씬 치명적이라고 그만하길 다행이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춘천집에 왔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내가 주차해야 할 자리에 옆집 차와 똑같은 RV차가 주차하고 있었다. 어디 오셨냐고 물으니 그 집 딸이란다. 엄마 집에 왔다는 말투가 워낙 단호해서 여기는 내 집이란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 이따 나갈 때 연락 부탁드린다고만 얘길 했다. 그러고도 기선 제압이 안된 느낌이었는지 엄마 집에 밥 먹으러 왔단 말을 남기고 매몰차게 들어가 버렸다. 우리 집 앞엔 여전히 전화번호 없는 아반떼가 놓여있었다.

건너편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울서 가져온 짐을 내렸다. 그리고 집주에게 아반떼 처리법을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여름 나도 그 차주에게 간접적으로 얻어먹은 무와 배추도 있고 집주와 내방하는 이웃이니 불편해도 넘어가곤 했지만 한 달 이상 장기 주차는 너무 상식 밖이라 생각됐다. 집에 들어와 정리하고 밥 먹고 아이와 얘기하면서 주차에 대한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현관을 열고 직접 나가봤더니 옆집 노인네였다. 얼른 내 차를 옮겨대라고 했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나중에 따님 가면 천천히 해도 되는데....."한 시간도 채 안돼 가버린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얼른 차를 옮겨대라는 반복적 노인네의 큰 음성에 묻혀버렸다. 그 딸은 밥이나 먹고 갔을까?

며칠 뒤 서울로 가기 위해 차를 빼려는데 이번엔 아들까지 합세를 해서 우리 집 대문을 막지 말고 자기 집 쪽으로 바짝 당겨 주차하라고 아주 크게 말했다. 내 불편함을 아는 듯이 얘길 했다.

"아, 네 그럴게요.. 근데 지금은 제가 서울을 좀 가야 해요."

내 차를 자기 집 앞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아드님께 민망함을 준 건 죄송스러웠지만 난 수도 없이 지금은 서울을 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1년 전 낯선 이방인으로 여기 춘천에 겁 없이 발을 들여놓은 나, 이제 이웃사촌이 생긴 거 같은 뿌듯함이 드는 건 왜일까?


PS. 집 앞 아반떼 차주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집주 사모님의 지인이 얘기해줬단다. 그럼에도 이해가 안 가는 건 내 야박함 때문일까?

이전 06화 지금 죽어도 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