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죽어도 된다는 말은 비극적인가? 부정적인가? 절망적인가? 모두 아니다. 나는 지금 당장 죽기를 소망하지는 않으나 죽음에 크게 두려움이 없다. 왜 나는 지금 죽어도 괜찮은 걸까?
나는 지금 뭔가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다 해봤다는 뜻이 아니다. 다 해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앞으로 사는 동안에는 마음에 있었으나 못했던 것들을 하는 시간으로 보내는 게 적절한 때가 왔다(긴긴 노후까지 먹고살 걱정은 없냐고 묻겠지만 그 문제는 접어둔다). 그것은 도전이 아니라서 목표 같은 것이 필요 없다. 예컨대 책 욕심이 많아 사서 쟁이고 못 읽었던 것들을 읽고, 상념이 많아 수시로 메모하고 써둔 글들을 제대로 완성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런 일들이야 즐겨하다가 말면 그뿐이다. 누구의 도움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도 혼자 할 수 있다.
하루를 살아가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도 있다. 겪지 말아야 할 것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고 듣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죽음은 해결해 줄 수 있다.
얼마 전에 연명치료포기에 서명했고 인증카드가 발급되어 나왔다. 다른 사람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장기 기증까지 할 것이고 연구목적으로 사용되는 영광을 준다면 기꺼이 기부하고 싶다. 뼈가루를 담아 유리 찬장에 전시하는 건 정말 질색이다. 어떤 형태로든 나의 육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길 유연장에 써놨다.
이제 나는 꼭 책임져야 할 것이 없다. 자식은 성인이 되었고 사회 일원으로 제 삶을 살아갈 것이고 갚아야 할 빚이 있긴 하지만 다행히 나의 죽음은 마이너스는 안되게 만들어놨다. 다툴 형제자매가 없으니 딸이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날 수도 있겠다.
너무 오래 살면서 매일을 똑같이 사는 것은 젊은 시절, 다이내믹하게 살았던 인생에 오점을 남길 것이다. 거기다 질병과 노쇠에서 겪게 될 많은 상실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죽음도 인생의 계획에 포함시키면 어떨까? 부득불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포함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훨씬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운명의 칼자국 혹은 방황으로 생긴 균열이 깊은 감정의 골이 되어 몸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한다."<유영만, 언어를 디자인하라 P19>
소위 인생 전반의 크거나 작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한 것들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님의 사랑싸움(지금에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을 보며 살았다. 그 덕분에 사춘기 때부터 책, 특히 소설을 많이 읽었고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 같다. 소설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지금 나의 모습을 만들었다. 부부의 삶이나 육아의 삶, 남녀의 사랑이나 미움 등에 나만의 가치관이 생겨났다. 당시 힘들었던 칼자국 덕분에 조금은 어설펐지만 그나마 만족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책을 비롯해 많은 지식창고들에서 얻는 기쁨이 너무 크다. 죽을 때까지 가능한 한 공부하며 살기를 원한다. 매일 그렇게 살아온 지 꽤 되었고 매일을 만족하게 사유하며 살기 때문에 오늘 죽는다고 해도 그리 억울하지 않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되도록이면 많은 양의 책을 읽고 공부하며 쓰고 싶지만 내 능력의 한계가 있고 거기다 나이도 들어간다. 그 활동들이 언제까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지금 죽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