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가 있으면 날아야지
단편소설 <백운정과 이기주 이야기>
1,
소식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알만한 애들한테는 다 연락을 해봤는데 최근에는 거의 전무하네.
직업이 뭐였어?
사대 나와서 국어교사 하다가 진즉에 그만두고 잡지사 기자 노릇을 한 모양이야. 한때는 운정이한테 주얼리를 구매하는 친구들도 있었어. 보석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더라고..... 근데 최근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네.
민선이랑 친한 것 같던데?
민선이도 몇 달째 연락을 못했다네.
민선이도 운정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고?
그런 모양이야. 오죽하면 밀수업자나 브로커, 국가정보요원인가 하는 얘기까지 나왔겠어? 분위기도 좀 오묘해서 궁금한 애들은 물어본 모양인데 그냥 얼버무렸대. 나야 다 들은 얘기고. 근데 너는 왜, 뭐가 궁금하냐?
기주가 묻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답해주던 철수가 힐끗 쳐다보며 되물었다.
한동안 카페에서 둘이 호작질해대더니 뭐 정분이라도 났더냐? 너넨 학교에서 옷깃 한번 스친 적 없는 말로만 동기동창인데?
백운정이 5학년 학기 초 전학을 가고 없는 학교에 이기주가 1년 남짓 다녔으니 철수 말이 맞았다. 시골 촌놈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던 철수와 재회하면서 동기들이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입했지만 어린 시절 학교만큼이나 낯섦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카페는 조용했다. 개설된 후 2년 정도는 활기차게 운영되었던 듯했는데 그 중심엔 백운정이 있었다. 그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에피소드로 흥미진진하게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꽤 선정적인 내용도 격이 떨어지지 않았고 어떤 글은 코끝이 찡했다. 고급 언어를 사용했지만 문장이 매끄럽고 어렵지 않아 쉽게 읽혔다. 운정의 글은 여타 동기들의 글에 비해 서너 배 많은 조회수가 찍혔고 종종 낯선 동기들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어떤 친구인지 궁금해서 앨범을 뒤졌지만 동명이인조차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가 자신과 7개월 시간차로 같은 교정을 한 번도 밟은 적이 없음을 알게 됐다. 궁금증은 더 커져갔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습관처럼 카페를 열어 그녀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지난해 3월 5일,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월요일 오전 8시 40분! 로그온을 하자마자 열리는 메모장에 그녀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기주는 심장이 겉으로도 확인될 만큼 요동을 쳤다.
2,
오늘부터 다시 눈도장 찍는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누군가와 굿모닝 인사를 나눈다는 것! 너무도 빠른 세월에 점이라도 찍어야지.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친구들, 기억에 남을 재밌는 일 한 가지씩 품고 가라.
그날 운정의 글이 카페에 오른걸 어찌 알았는지 방문수가 두 배에 달했다. 평소엔 눈팅만 하던 친구들이 운정의 글에 한 마디씩 더했다. 기주는 운정을 직접 아는 체 하진 못하고 성준의 댓글에 추가댓글을 달았다.
얼굴 보여줘서 고맙다. 이제 자주 볼 수 있는 거지?
성준아. 난 아무리 봐도 운정이 얼굴이 안 보이네. 얼굴을 보려면 어떤 장치가 필요하나?
운정은 말한 대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 30분에서 8시 50분 사이 그날의 심상을 카페에 적었다. 그런 운정의 메시지를 읽으며 기주는 매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3월 18일 08:36
어제는 최악의 하루! 늘 좋은 날이길 바라지만 속상함과 울분으로 족히 한 시간을 통곡했다. 나이 들어 이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이니 최악의 날인거지. 근데 실컷 울고 기분 전환차 사우나 가서 3시간 땀 빼고 나왔더니 그렇게 노력해도 안 빠지던 원수 같은 살이 2킬로그램 이상 빠졌다. 눈물과 땀이 최상의 날을 만들어준 셈. 야호~
동기카페 대선배 운정친구야.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어야 해. 일전에 사내인 나도 실컷 울고 났더니 카타르시스 되어 속이 시원하더라. 울음은 동의보감에 따르면 순환이라고 하는 양생의 방법 중 하나. 카페 새까만 후배 이기주, 인사 올린다.
그녀를 울린 작자를 당장 두들겨 패주겠다고 말하려다 몇 번을 수정하고 수정한 끝에 답글을 올렸다.
기주는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감성을 두루 가진 친구 같구나. 언제 기회 되면 만나서 얘기 나누자.
냉철하고 감성적이라고? 나를 언제 봤다고 아는 듯 말하는 거지? 만나서 얘기하자고? 데이트 신청하는 건가? 기주는 운정과 말문을 텄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3월 21일 08:16
짧으면 3년, 길면 5년 안에 집을 정리할 생각이다. 평소에도 버리기를 잘하지만 아직 버릴 게 너무 많아. 내가 게스트가 되어도 편한 집을 만들 수 있을까?
너라면 가능할 거야. 우리 민족처럼 땅과 집에 집착하기도 드물지. 나도 초원의 유목민들처럼 게르 하나 짓고 흐르는 구름처럼 유유자적한 노매드로 살아보고 싶다.
3월 22일 07:42
오늘은 초여름이란 날씨 예보에 스타킹을 벗었다. 민소매 원피스에 화이트 카디건을 걸치고 은빛 구두를 꺼내신었다. 어제 속눈썹 연장 시술을 받은 덕에 눈화장에 걸리는 시간 20분을 단축했어. 오늘도 모두 기분 upupup
백운정. 성공적인 시술 축하드린다. 나도 어제 밤샘 술에 시달려 사우나 가서 땀 좀 빼고 하루 일과 시작한다. 힙 upupup
3월 24일 08:19
어제는 동료의 거래처이기도 한 양평의 한 갈빗집으로 팀회식을 다녀왔다. 맛난 고기에 막국수, 더덕 막걸리 한잔하고 근처 절에 가서 소원성취 대신 업장소멸 삼배를 하고 왔다.
고기 먹고 절에 가서 육채 냄새 풍기며 스님들 불심을 흔들어놓고 왔구먼. 백운정이라면 분명 페브리즈 정도는 뿌리고 갔으리라.
3월 25일 08:02
외국 영화 촬영을 한다고 마포대교를 일주일씩이나 통제한단다. 국익이 있는 일이라면 몰라도 내가 가는 길을 막는 자, 용서가 안되네 ㅎㅎ
영악한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에 이용당하지만 않아도 다행이지. 서울 교통 정체가 장난이 아닐 텐데...... 운정아. 내가 볼 때 너는 서울보다 경주가 더 적합한 여인이다. 내려와라.
3월 26일 07:55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이 누리끼리하다. 안개라면 물분자와 같으니 해가 뜨면 걷힐 거고, 스모그라면 안개와 매연 덩어리가 얽힌 일시 현상이라 위로하겠지만 이 놈의 미세먼지는 황사보다 사람을 더 주눅 들게 한다. 푸른 하늘빛을 본 날이 까마득하고 공기는 밤낮없이 텁텁함의 극치다. 중국 탓만 하고 있는 이 정부는 무능의 극치 아닌가?
좌운정. 미세먼지는 황사마스크로도 걸러내지 못한다. 동사무소 가면 방독면 줄 거다.
언젠가부터 기주는 운정을 그렇게 불렀다. 어느 날 기주가 올린 글 하나에 운정이 정치적 커밍아웃을 하면서 시작됐다. 운정과 기주가 거의 매일 댓글에 댓글을 달고 그 댓글에 아무도 반응을 안 하면서 둘만의 재미에 빠져있을 때 카페지기 영준에게 전화가 왔다. 카페는 모두가 보고 참여하는 공간이니 오해 없도록 하라는 거였다. 몇 명이 벌써 자제시키라고 연락이 왔다고 했다. 이후 그동안의 글들을 읽어보니 누가 봐도 운정에게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3월 27일 08:55
다정(多情)은 병이지? 나의 다정은 두루 넓게 온기가 있는 게 아니라 어느 하나에만 촉이 서 있다. 사랑이 있음에도 또 다른 사랑이 찾아들었으니 그건 분명 '다정'인 거고, 이는 부도덕한 건가? 더구나 살 내리는 외사랑인데 이를 어찌할거나?
백운정. 이 나이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사는 너가 부럽다. 혹시 나니?ㅋㅋ따귀소년 올림.
이기주. 남자나 여자나 남녀상열지사에 무관심해지면 인생 다 산거 아니냐?
3월 28일 08:10
비 온다. 1년간 날 해바라기한 놈과 이른 저녁 약속이 있다. 오늘 날씨 때문에 괜히 추적한 마음이 생길까 두렵다. 여차하면 뽀빠이를 불러야지.
백 씨 아줌마. 조금 있으면 동기회 총모임도 있는데, 그 열정과 욕망은 고이 아껴두었다가 너를 그리워하는 우리들한테 흠뻑 쏟아내면 안 되겠니? 특히 이 아무개란 놈한테 말이야. 그리고 새겨라. 너의 뽀빠이가 되고 싶은 내 이름 석자를.....
이기주뽀빠이. 살려줘요~~~~
다음날 오전 마음 약한 영준이는 다시 한번 전화를 했다. 카페지기로서 전체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니 오해 말아달라고 비굴할 정도로 여러 번 설명을 곁들였다. 기주는 한 달가량 쓴 자신의 글을 재차 읽어보았다.
운정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기에게나 다른 친구들에게나 다를 바 없는데 자신은 노골적이고도 구차하게 질퍽거리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자중하란 말을 들을 만했다.
3.
3월의 마지막날 밤 10시, 반년 전부터 계획해 왔던 포항 비학산에서 영덕 동대산까지 42킬로미터 야간 산행에 참석했다. 출발 전. 유치하기 짝이 없게도 운정을 향한 연정을 떨쳐버릴 극기훈련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부산을 떨었지만 8만보 이상을 걸으며 잠깐씩 존 시간을 빼고는 내내 그녀만 생각났다. 그럴 때마다 괜스레 기분 좋은 웃음이 났다. 도대체 그녀를 언제 본적이나 있다고 이러는 것인지. 혼자 연애라도 하듯 착각에 빠져 친구들에게 우습게 보일 만큼 천방지축으로 해댔는지 스스로도 유례없는 비이성적 행동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더구나 자신에겐 치러야 할 죗값이 산더미 같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몰려드는 순간 온몸에 물기가 다 빠져나가는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찰나 앞서가던 그룹 중 무릎 부상자가 생겼고 팀원 중 막내인 그가 20킬로그램이 넘는 배낭 하나를 더 매고 걷게 되면서 엄청난 열병에 몸살을 앓았다.
족히 보름은 지나서야 카페에 들어간 기주는 운정의 글 한 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늘 자상하고 파워풀한 댓글남 기주가 너무 오랜 시간 보이질 않네. 친구들아~내가 일주일 이상 안보이거든 반드시 연락해 주라.
카페에서 운정이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평정심에 회오리가 몰아쳤다. 카페에서 말고 따로 연락을 해보고 싶었다. 전날 서울에서 근무하는 친구, 배진섭이 워크숍 때문에 경주에 와 있다고 연락을 했었다. 컨디션을 핑계로 못 나갔지만 그를 이용할 방법이 번뜩 떠올랐다.
경주에 왔으니 그래도 얼굴이나 보고 가라고 문자를 만들어 진섭이 아닌 운정에게 잘못 보낸 듯 보냈다. 동기회 연락처 수첩에는 진섭 바로 아래에 백운정이 있었다. 한참 뒤 운정은 잘못 보냈으니 다시 보내라는 마른 답장을 보내왔다. 착각이었나? 기주는 열 자밖에 안 되는 운정의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연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주는 경주시청 휴게실에서 나무 판매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산림자원과 담당 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전, 접수를 한 건이라 벌써 해결되었어야 했지만 담당자가 암이 재발하여 인수인계가 제대로 안된 상태로 해당 부서가 공석이 되는 바람에 이번 달에도 엄청난 대출 이자를 물어야 했다.
전화로 수 차례 문의했지만 그때마다 대리업무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금시초문인 듯 반응하는 통에 서류를 다시 준비해서 직접 방문한 것이다. 공무원들의 무책임하고 체계 없는 업무 행태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어쨌든 하루하루 답답한 사람은 기주였다.
상부 보고차 자리를 비운 담당자를 기다리며 휴게실 창 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지잉~바지 속에 있던 휴대전화가 떨렸다.
그날 진섭인 잘 만났니? 나 운정이.
영준에게 두 번째 경고를 받은 이후 기주는 의도적으로 카페를 멀리했다. 사업 상황도 급격히 나빠져서 분주하고 마음에 여유가 없기도 했다. 얼떨결에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기주에게 운정은 한 번 더 안부를 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갑자기 소식이 없으니 걱정돼서......
반갑다. 백운정. 정말 나 걱정돼서 전화한 거야? 이거 눈물 나게 고마운걸? 내가 카페에서 너무 오버하는 바람에 친구들이 불편한가 봐.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자르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그렇다고 도망가버린 거야?
운정은 말도 글느낌과 똑같았다.
지금 그 말은 꽤나 도발적인데? 내가 칼을 뽑은 건 어찌 알았을꼬? 너에 대한 마음이 숨긴다고 숨겨지질 않았나 봐. 카페에선 한계도 있고.
도발이 아니라 의도된 추파라면?
내가 너무 아둔했나?
기주는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난 문자로도 얼마든지 사랑을 나눌 수 있던데.....
비루함이나 부도덕함에서 그나마 자유로와 좋잖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너를 글 세상에서 흠모한건 사실이야.
내 글의 행간까지 읽어내는 너가 좋더라. 극과 극을 오가는 너의 감성도. 그것을 표현해 내는 방법도 좋았어. 분노하는 포인트도 좋고.... 키도 크고 잘생겼던데?
운정이 수줍게 웃었다.
어? 어디서 본거야? 난 너의 머리털 하나 본 적이 없구먼. 앙큼하게.
기주는 운정을 둘만의 대화방을 만들어 귀하고 소중하게 초대했다.
4.
난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봐. 쓸 것도 없고 쓰고 싶지도 않아.
지난번 신춘문예 당선작은 특수한 직업 얘기가 많았어요. 본인의 직업이든 취재한 것이든 일반인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의 얘기들, 결국 파격적인 소재와 인물이 먹힌다는 말인데, 정말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몇 편 쓰면 누가 봐도 내 글인걸 안다니까.
지난번과 이번 작품은 주인공 이름만 바꿔놓은 것 같다고 악평을 들었어.
소설을 자기 경험치로만 쓴다면 당연히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
그러면 심혈을 기울여 내 모든 걸 짜내서 대작 한 두 편에 올인하는 게 맞나?
신문기사나 누가 던진 한마디만 가지고도 원고지 100매는 거뜬히 써낼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던 김향숙도 오늘 합평시간엔 징징거리고 있었다.
운정도 머리가 무거웠다. 바로 보름 뒤 또 작품 발표 시간이었다. 지난번 것도 미완성작으로 내보냈었다.
운정이 소설을 공부해 보기로 한건 등단이 목적이 아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오랜 시간 틈틈이 취미로 긁적여놨던 글들을 제대로 손봐서 자가 출판이라도 책 한 권 만들어보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회원들이 등단에 목표를 두고 치열하게 공부했고 아마추어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실제로 매년 어떤 채널을 통해서라도 한 두 명씩은 등단하고 있었다. 문화센터 작가수업을 그저 하릴없는 주부들의 취미 생활 정도로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운정을 부추긴 건 첫 작품 합평날 소설가 강사의 엄청난 칭찬 때문이었다.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가 탄탄하고 필력도 있고 문체도 탁월하다고 등단을 위한 작품을 차분히 준비해 보라고 했다.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재능이 보인다고 바람을 넣은 것이다. 신이 난 운정은 석 달에 한편 꼴로 작품을 제출하고 이번 연말에는 출품 가능한 작품을 써보자고 매달리고 있었다.
서너 편 쓸 때까지는 재미있지. 그 이후엔 실력도 늘지 않고 무기력해져서 아예 손을 놔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5년째 오로지 단편소설 등단을 목적으로 글을 써온 박미애가 뼈 있는 말로 운정의 기를 죽였다. 그럴수록 운정은 소설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새로운 글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호평받은 작품을 보완해서라도 출품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또한 글감을 찾는 하이에나가 되어갔다.
작가들이라고 무한대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 사건을 찾는 힘이 중요해.
운정은 뭔가 찌릿한 게 느껴졌다. 사건을 만들지 못하면 찾아야지. 현실이 다 소설이 되는 게 아니라 소설이 현실이 되면 흥미로울 수도 있겠네.
모르는 건 아닌데...... 운정은 또다시 머리가 하얘졌다.
그날밤 인터넷 뉴스를 서핑하다가 오른쪽 상단에 'N', 자주 가는 카페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는 표식에 눈이 갔다.
북한산 지역 등산카페와 사이클 동호회 카페에 이번달 일정이 올라와있었다. 등산카페는 일요일 산행이 있고 자전거동호카페는 1박 2일 라이딩을 안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불참한 지 오래되었다. 더구나 자전거동호회는 운정과 박사장이 오픈을 했지만 회원 중 두 사람이 내연녀를 가입시키는 바람에 도덕성 문제에 대해 의견이 나뉘면서 운정은 슬그머니 참여 빈도수를 줄였고 3년간 해외 파견 근무를 핑계 삼아 탈퇴하려 했지만 회원자격은 유지하라고 해서 남겨둔 상황이었다. 박사장이야말로 소설 주인공으로 구색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지만 그를 세상에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
또 하나의 카페. 초등학교 동기카페였다. 남편과 이혼한 후 역시 활동을 중단했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 오류로 여러 번 접속에 에러가 나더니 마지막 시도에 카페가 열렸다. 그 사이 몇몇 낯선 이름들이 들어와 있었다.
한 줄 메모장에 간단히 안부글을 올리고 로그아웃했다. 다음날부터 출근하면 아침 일지 쓰듯 짧은 글 한 줄씩 올리겠다고.....
며칠이 지났을 즈음, 운정은 기가 막힌 인물을 발견했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고 덧대고 자르고 하기에 아주 적절한 인물. 이기주! 그는 수줍어했지만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였다. 작년 12월, 스스로 경주 안강에서 소똥과 더불어 사는 촌부라는 가입인사를 남기고 길게는 A4용지 여덟 장은 될만한 분량의 산악기행이나 낚시 여행기를 올려놓았고 역사관이나 경제관은 물론 인생철학까지 그 캐릭터가 가히 매력적이었다. 거기다 자신에게 엄청난 관심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가제:날개가 있으면 날아야지
글:백운정
병선은 지영이를 부추겨 화장대 거울 앞에 앉혔다. 자신의 온몸을 등받이로 내어주어도 겨드랑이 쪽을 겁박하듯 있는 힘을 다해 감싸 안아도 허리가 바로 서지 못했다.
"지영아. 머리카락이 좀 더 자라면 예쁘게 묶어줄게. 오늘 아빠 친구 딸을 봤는데 머리카락이 엄청 길어. 이제 열 살이라는데 키가 우리 지영이보다 큰 것 같더라. 우리 딸도 키 한번 재볼까? 얼마나 컸을까?." 병선은 지영일 아예 둘러메듯 업고는 벽 쪽에 표시된 눈금표시자에 갖다 대는 시늉만 했다. 병선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고 지영은 마치 알아듣기라도 하듯 머리를 들었다 떨구기를 반복했다.
대학생활보다 감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병선이 자퇴를 하고 경주를 내려와 김인숙과 결혼을 했을 때 두 사람 다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아버지 김길춘의 뜻대로 조경사업을 물려받겠노라 맹세도 했다.
김인숙은 어릴 적부터 한집에서 자랐지만 어떤 연고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인숙의 아버지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건 분명한 듯했다. 김길춘이 병선의 사 남매와 같이 자식처럼 키웠고 전문대학까지 보내서 졸업 후엔 지역농협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거처까지 마련해서 내놓았다. 하지만 정작 병선이 인숙에게 관심조차 없이 바깥으로만 돌다 구치소 감금 후 풀려난 날이었다. 그녀가 돌연 약을 먹고 중태에 빠져다는 연락을 받았다. 병선이 병원에 누워있는 김인숙의 싸늘한 미소를 본 건 충격이었다. 큰누나는 인숙 집안과의 악연을 말하며 병선을 설득했다. 그들의 결혼만이 해결책이라고 모두 믿고 있다고 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임신이 됐을 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약을 먹은 걸 문제 삼아 불안해했지만 김길춘은 아들의 마음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아이를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우려한 대로 아이는 경련성뇌성마비로 온전치 못했고 병선은 다시 휘청거렸다. 술과 도박으로 방탕한 생활이 이어졌다. 지영이 백일을 막 넘겼을 때 김인숙은 또 한 번 약을 먹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도박장 한 귀퉁이에서 폐인이 되어 있는 아들을 붙잡고 쓰러지면서 김길춘도 사지에 마비가 왔다.
중략
11월 정출은 손맛을 보러 나오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수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바람까지 불었다. 이 날씨면 참석률이 반을 넘기 힘들었지만 거의 모두가 모여들었다. 눈이 풀리고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병선을 감시하러 나온 것 같았다.
"형님. 저 같은 인간이 아직 살아있어요, 모두 나 때문에 죽었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낚싯대를 치고 옆에 앉은 장호에게 쉰 목소리로 뇌까렸다."이 사람아. 자네가 마음먹고 한 일이 아니지 않나."
"제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막살도록 태어난 인간. 그리 살다 가게 놔둘 것이지. 그랬으면 나 하나로 끝날 일을... 꺼이꺼이"
"그래도 어디 부모가 그럴 수 있나? 자네를 그렇게 내 몬 것도 어르신 탓이라 생각했던 걸세. 자네도 아비가 됐으니 몸 추슬러 살아야지."
"인숙이가 제게 벌을 주고 간 겁니다."
"인숙이도 자네를 살리려고. 그리고 지영이를 살리려고 그랬을 걸세. 자네가 방황하지 않고 잘 살아주기를 바랐던 거야."
김길춘마저 제초제를 마시고 목숨을 끊은 지 보름이 지났다. 병선이 쇳소리가 나게 통곡을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후략
운정은 기주를 "김병선"으로 만들었다. 둘만의 SNS공간에서 기주가 자기 때문에 세 사람이 죽었다고 말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은 건 끔찍해서라기보다 예상보다 다이내믹한 얘깃거리를 가진 그를 한눈에 알아본 자신의 감각에 놀라서였다.
기주의 인생은 그 자체가 소설이었다. 그와의 통화는 모두 녹음되고 문자와 함께 고스란히 원고지에 옮겨졌다. 70매를 훌쩍 넘길 즈음 동기회 회장의 부친상이 공지되었다. 그동안 갖가지 핑계를 대며 미뤄왔던 기주와의 대면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기주를 만나게 되면 소설을 마무리할 수 없을까 봐 불안했지만 문자와 전화로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 한계 상황이기도 했다. 만나서 뭔가를 더 끌어내겠다는 일념으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경주에서 만나 통영 장례식장으로 가기로 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으로 한껏 긴장되어 있었다.
5.
뒷동산에 다니면서도 분칠을 하는가?
서울 가는 길인데 술 한잔 사주시게나.
경주에서 만났을 때 운정은 1초 안에 기주에게서 마음이 떠났다. 큰 키가 무색할 만큼 마르고 구부정한 몸. 시골 노인네들이나 입음직한 갈치빛 양복은 또래보다 열 살은 많이 보였다. 현실도 소설도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두 번을 더 만났다. 아니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소설이 끝나지 않았다.
운정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음을 눈치챈 기주는 간혹 느물거리고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불쑥불쑥 낮이고 밤이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모처럼 카페에 <벚꽃 술잔>이란 시를 올린 날이었다. 수도권 인구가 2300만 명인데 술 한잔 쳐줄 사내가 없더냐고 문자가 왔다.
당연히 없겠지. 똑똑하고 품위 있고 배우 뺨치는 외모에 싱싱하고 돈도 있는데 백운정이만 사랑하는 놈이 있을까? 그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글에서도 들렸다.
벽계수는 천박하고 서경덕은 매가리가 없다고 탓하겠지. 네가 바라는 사내를 설령 찾는다 한들 이미 주인이 있다고 도덕성 운운해 가며 내치고 또 다른 놈의 술잔을 채우게 되겠지.
기주는 이제 운정을 완전히 발가벗겨놓고 풍악까지 울리며 놀고 있었다.
너랑 고작 몇 개월 가까이하면서 내 삶은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미친년 술상 들고 나르는 것처럼.... 문자로는 요녀 뺨이라도 칠 듯하다가 두어 번 만나더니 말끝마다 네가 내 서방이라도 되느냐?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내치더라.
여자의 변심은 무죄인 거야. 내가 뭔 실수를 했거나 그 사이 딴 넘이 생겼거나. 더 가서는 안 되는 거 알지. 마음은 그런데.....
기주의 술기 먹은 목소리에 허망함마저 묻어있었다. 운정은 미안한 마음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비겁한 변명을 만들어보려 했지만 기주는 얼른 받아쳤다.
성인군자 납셨네.
그런 도덕심은 왜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으셨나?
하늘에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는데 무슨 도덕이나 관습이 필요할까? 대자연에는 인간사 흐름 따위는 없다 해도 나름 이치는 있을 거야. 인간이니까 일탈도 하는 거고....
기주의 말에는 다분히 비아냥거림이 내포되어 있었다. 잠시 침묵하다가 호세필리치아노의 집시 동영상을 올려놓더니 사라졌다. 운정도 사라졌다.
백운정의 출판기념회. 3년 만에 장편소설로 완성된 <날개가 있으면 날아야지>는 K사에서 출판을 했다.
백여사!
무심코 받은 전화. 낯익은 음성에 낯선 호칭이 들렸다.
누구?
나를 잊기엔 너무 짧은 시간 아닌가?
직접 보여줄 테니 잠깐 밖으로 나와 보셔.
운정은 코트를 걸치고 출입문쪽으로 향해 걸어 나갔다.
이러려고 나를 이용한 거였어? 이 정도면 완벽한 개인정보유출 아닌가?
기주가 허연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의 얼굴로 운정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