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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엣지정 Dec 02. 2021

공백(空白)

단편소설 흐르는 사람들

 

 

 이른 새벽잠을 깬 수경은 혜영 부부에게 선물 받은 바이브레이터에 콘돔을 끼웠다. 어설프게 술을 마신 날은 꼭 선잠을 잤다. 눈을 뜨고 어둠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다섯 평 남짓한 침실이 열 배는 크게 느껴졌고 계절을 불문하고 소름이 돋았다. 마스터베이션을 시작한 지 1분이나 지났을까? 수경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허공을 상대로 너무도 쉽고 짧게 느낀 오르가슴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이젠 이런 식으로 나를 혹사시키진 않을 거야.’

 수경은 낡은 면 티셔츠에 기구를 여러 겹 싸서 박스테이프로 돌돌 말아 재활용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다짐했다.

 연애를 할 때도 부부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경이 만족한 섹스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서툴러서 그러려니 했다. 남편과 늘 신혼 같은 성생활을 한다는 혜영은 수경을 걱정했다. 남녀 간의 신뢰는 섹스에서 생기며 가정이나 사회생활의 원동력도 섹스의 만족도에 따라 좌우된다고 역설했지만 혜영이 유별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결국 수경에게 유일했던 한 남자에게 ‘영혼 없는 욕망의 분출구’ 정도로 치부되고 말았지만, 설령 처음부터 문제라 진단했어도 별다른 대처를 하진 않았을 거다. 순종만이 모든 걸 그대로 유지하는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새벽, 그와의 마지막 섹스는 수경의 전부를 흔드는 거대한 사건이었고 너무도 생생하여 늘 새벽잠을 깨워서 자위를 부추겼다.

  ‘그와 함께 하는 동안 육체나 정신적으로 행복하지 못했다면 그건 오롯이 내 잘못이야. 상대를 탓할 일이 아니지. 그는 내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잖아? 참고 견딘 것이 나를 망가뜨리고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거였어. 이젠 아니야. 그만해야지.’

 수경은 침대 앞 전신 거울 속에서 무너지지 않은 자신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침실에 전신 거울을 두는 건 숙면을 방해하고 부부관계를 헤친다는 사실을 엊그제야 알게 됐다. 침대 오른쪽 협탁 위에 놓인 지갑이 거울에 비쳤다. 거기엔 1973년 음력 11월 18일생으로 40여 년을 살아온 수경이 아닌 741118-2****** “조지형”이란 낯선 이름의 주민등록증이 들어있었다.  

 ‘조수경의 흔적을 지우는 건 이제부터야. 조지형으로 새롭게 살 수 있게 도와줘.’

무슨 큰 의식을 치르듯 수경은 두 손을 모으고 주민등록증에게 넙죽넙죽 세 번 절을 했다.

 

 어릴 적부터 언니 둘과 함께 썼던 방은 일곱 가족 누구라도 아무 때나 들락거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조차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밤낮없이 쫓겨나기 일쑤였다. 사춘기 때도 수경은 신체적 감성적 변화를 자각할 공간이나 시간적 여유는 물론 브래지어 하나도 제대로 자기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 비해 혜영은 1년에 4번씩 정기적으로 엄마가 신체 사이즈를 재고 그에 맞는 속옷을 골라 입혔다. 혜영의 집에는 18세기 프랑스 여배우들이나 입을 법한 파운데이션과 패티코트, 슬립, 캐미솔 같은 란제리류, 브리프, 블루머 등의 각종 언더웨어들이 패션쇼장을 방불케 하는 다양한 옷들과 함께 넘쳐났다. 또한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과자며 인스턴트 캔 제품들이 냉장고와 집안 곳곳 수납장 안에 국적 불문의 상표를 달고 누워있었다. 수경은 아버지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인 혜영의 집에서 언젠가는 자신도 그렇게 사는 날이 올 거라 상상하면서 거의 매일 살다시피 했다.  밀실 같은 혜영이 엄마방 입구에는 엄청난 크기의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기하학적 문양의 그림 위에 혜영 엄마가 직접 썼다고 했다.

 <살아가는 동안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개발하고,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충족시키며 산다.>

 몸을 개발하는 건 어떤 걸까? 처음 접하는 말이라 낯설었지만 몸이 원하는 걸 충족시키며 사는 삶은 막연하나마 멋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수경은 자신도 좋은 문구 하나를 만들어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며 살아야지 마음을 먹었다.  

 고2가 되는 이른 봄날, 혜영과 함께 혜영 엄마가 일하는 P호텔 내 의상실로 심부름을 갔다가 처음으로 혜영 엄마를 보게 된 수경은 자기도 모르게 아! 감탄사를 뿜었다. 수경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날 이후 수경은 그녀처럼 되리라,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수경에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취업시즌에 큰 행운이 찾아왔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백화점 여성의류 매장에 영업사원으로 합격을 한 것이다. 대학 진학을 한 혜영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혜영도 수경에게 ‘너처럼 운 좋은 년은 본 적이 없다’며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수경은 출근 첫날, 수첩에 욥기 8장 7절을 크고 진하게 옮겨 썼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내 나중은 창대하리라! ”

 

 백화점 업무에 익숙해질 즈음 수경에겐 또 하나의 행운이 들어왔다. 직원 야유회에 갔다가 MT 온 대학생 박종기를 만난 것이다. 혜영과 예전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언니 둘이 지방에 취직이 되면서 오빠들의 치다꺼리와 아버지의 술 횡포는 고스란히 수경의 몫이 되어 하루하루 절망적인 다람쥐 쳇바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언니들처럼 박차고 나갈 용기도 없는 스물두 살의 수경은 속이 다 타서 말라버린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그때 홀연 나타난 박종기는 거대한 보호자이자 혜영만큼이나 화려한 은신처였다.

 종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경을 찾아왔다. 학교 수업이 없는 날에도 수경의 퇴근시간에 맞춰 와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는 등 데이트를 하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외모까지 준수한 종기가 뭐 하나 잘난 구석 없는 수경에게 정성을 쏟는 걸 직장동료들이나 친구들이 쑥덕거렸다. 수경도 처음엔 장난같이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이 진지한 모습에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혜영은 아타라시한 수경이 매력적이라 말하면서도 종기에겐 분명 치명적인 팩트가 있을 거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종기가 졸업을 며칠 앞두고 증권사 취직이 확정되자 본격적으로 결혼을 보채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대학 법대를 삼수까지 해서 들어간 그가 군 복무기간 외에도 서너 차례씩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빈둥대며 집안에서는 돌연변이로 눈밖에 난지 오래였다. 그러던 그가 3개 월 만에 증권, 파생, 펀드 투자 3종 자격증을 따고 금융권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실전 같은 면접스터디를 받고 상상외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경과의 결혼을 위해 이 악물고 얻어낸 성과라고 했지만 종기에겐 의외의 집요함이 있었다. 직장이 생기면 결혼을 허락하겠노라 약속한 부모님에게 떳떳하게 라이선스를 내밀었다. 종기는 자기 몫인 2층 양옥집을 증여받고 하루빨리 부모로부터 탈피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종기와 그의 부모와의 불화는 듣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통보에 가까운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간 날, 수경의 가슴에는 종기의 집 담벼락만큼이나 높은 콘크리트 벽이 들어와 숨통을 죄었다. 마치 TV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어마어마한 집, 어머니 또한 연출된 탤런트 같은 모습으로 자리에 앉지도 않은 수경에게 싸늘히 말했다.

  “종기는 지 형들과 근본이 다른 자식이다. 큰형은 하버드대를 나와 현지 국가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아들 딸 낳아 잘살고 있고 둘째형은 박형구 의원이다.”

 어머니가 아느냐? 고 물어보듯 수경을 쳐다봤다. 수경이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애초 대답에는 관심도 없었던 듯 이어서 첫째 며느리는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둘째 며느리는 M 그룹의 딸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종기는 어릴 때부터 돌연변이였다. 내 아들이지만 내가 낳은 자식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종기의 30~40년 뒤 모습을 하고 앉는 아버지의 얼굴에 오만가지 표정이 읽혔다. 그들은 수경에 대해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통상할 법한 몇 가지 예상 질문을 뽑아 답까지 준비했지만 헛수고였다. 종기와 살 자신이 있냐고, 잘 살 자신도 아니고 그냥 살 자신이 있냐고, 그 하나만 여러 번을 반복해서 물었다.

 “네, 어머니. 잘 살아볼게요. 아버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살겠습니다.”

 수경도 교과서에 나오는 답을 앵무새처럼 말했다.

 “녀석의 집요함이 너에게 보여준 사랑이라 착각하진 말아라. 저가 하고 싶은 것은 설령 남에게 피해가 간대도 하는 놈이다. 그래도 살겠다 하면 마음고생은 너의 몫이고 물질적으로는 도와주마.”

 수경의 머릿속이 반짝거렸다.

 ‘먹고 살 걱정을 안 하게 해 준다고요?’

 하마터면 불쑥 물어볼 뻔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마. 아이도 신중히 생각해서 낳아라. 우린 복잡한 거 원치 않는다.”

 지금껏 묵묵히 있던 종기가 수경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그의 미간에 세 줄 주름이 유례없이 도드라져 있었다. 수경의 머릿속이 이번엔 하얘졌다.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는 건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었다. 종기에게 들은 바로 대충의 분위기는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모와 자식 간인데 뭐 했었다. 말로만 듣던 가진 자들의 삶도 반드시 편한 것만은 아니란 걸 낯설고 뜨악하게 경험한 순간이다. 종기의 말대로 같이 살 사람은 부모가 아니니 종구 생각만 하면 되는 거다 단순히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뭐라 해도 난 신데렐라에 버금가는 행운아인 것만은 확실하잖아?’

 눈을 감고 커피숍 의자에 기대앉은 종구에게 큰 연민이 느껴졌다. 부모에게 상처 받은 자들끼리 서로 보듬으며 살자 싶었다. 완벽하게 그의 편이 되어주리라. 종기의 큰 손을 수경이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종기의 부모님을 만난 이주일 후에 수경 종기 커플은 결혼식을 올렸다. 예상했던 대로 종기의 가족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형제들은 물론 어린아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지못해 참석한 종기 부모도 결혼식 내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못난이에게 타고난 복이 있을 줄 몰랐다고 수경 쪽 식구들만 북적거리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수경은 숟가락 하나 준비하지 않았다. 방이 다섯 개나 되고 마당까지 넓은 이층 집엔 모든 살림살이가 덤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한때 종기 부모님이 살았던 곳을 먼 친척 아주머니가 관리해왔다고 했다. 꿈만 같았다. 보란 듯이 잘 살아서 꼭 박 씨 집안의 셋째 며느리로 인정받겠노라 다짐했다. 불행 끝 행복 시작, 결혼은 수경의 인생을 반전시킬 거대한 이벤트였다.  

 “신부 조수경은 신랑 박종기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고 남편을 보필하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겠습니까? “

 “네.”

 주례사의 질문에 수경은 목청껏 힘주어 대답했다.  

  

 증권사는 박종기에게 잘 맞는 직장이었다. 왼쪽 양복 깃에서 반짝이는 H증권 배지는 그에게 썩 어울렸고 자부심을 넘어 안정감까지 주고 있었다. 그는 입사 첫 달부터 대리나 과장급의 월 20~30억 거래대금을 수월히 넘겼다. 그의 저돌적이면서도 침착한 양면성은 특유의 맨파워를 발휘했고 막강한 예탁자산까지 끌어들여 이른바 증권가의 신예로 등극해 있었다. 하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시기였지만 태국이 돌연 고정환율제를 포기하면서 아시아 대륙은 순식간에 곤경에 빠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거대 한보그룹에서 부도를 내는 상황이 발생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물론 눈치 빠른 내국인들도 투자 자금을 빠르게 회수해갔다. 금융가는 침울했다. 회사는 빠진 자금을 메꾸기 위해 목표치를 점점 높게 부여했고 급기야 개인계좌까지 돌려가며 수수료 실적 만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살얼음판이던 재계에 6개 월 뒤 다시 기아차 사태가 터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가 몰아쳤다. 12월,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는 발표가 나자 종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렇게 열정을 보였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정리해버리는 종기에게서 수경은 냉혈한을 느꼈다.  

 종기의 퇴사가 수경에게 당장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월급’이란 명목 하에 생활비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종기의 실업으로 인한 경제생활의 변화는 크게 체감할 수 없었다. 여전히 액수와 시기는 불규칙했지만 생활할 만큼의 돈은 주었고 한 번씩 통장으로 큰돈이 입금되기도 했다. 실직한 그를 위해 부모님이 도와주고 있구나 생각했지만 증권사 재직 때도 돈 문제로 부모와 언성 높이는 걸 여러 번 봐온 수경은 애써 방관했다. 언젠가는 통장잔고가 마를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문득문득 엄습하고 있었다.  

  

 지영순은 백화점 여성 의류 매장의 총괄팀장으로 수경보다 열두 살이 많았다. 입사 초기부터 친동생 버금가게 챙겨주었고 결혼 후에는 거의 매일 수경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처음엔 그녀가 지나치게 사생활 깊숙이 들어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친정과 시집식구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수경에겐 그들의 공백을 메워주는 적절한 인물이었으므로 내치지 않았다. 태영을 낳았을 때, 가족이라도 쉽게 못할 큰 역할을 선뜻 도맡아 해 주면서 수경과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영순이 못 오는 날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언니야? 미안해. 제영이 분유가 똑 떨어졌어. 앞에 슈퍼에서 사 가지고 들어올래? 뭔지 알지?”

 “그래. 김치를 좀 가져왔어. 대문 안에다 넣어고 갔다 올게. 문 열어.”

 “응, 언니 고마워.”

 지영순은 올 때마다 장을 보거나 먹거리를 준비해왔다. 그녀가 다녀간 자리는 수경의 빈틈을 차곡차곡 채워 항상 매끄럽고 반짝거렸다.  

 저녁식사 후 차를 마시며 수경은 새삼 지영순에게 고맙단 인사를 했다.

 “언니가 없었으면 많이 힘들었을 거야. 태영 아빠도 요즈음은 뭘 하고 다니는지 귀가시간이 점점 늦고... 권태기인가?”

 지영순은 수경의 눈에 그렁한 눈물을 보고 휴지를 한 장 뽑아 건네며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늘 갈망하고는 있었지만 아이들과 자금 문제 등으로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너의 재능과 이 집을 놀리기엔 너무 아까워. 여성복으로 홀세일 한번 해보지 않을래? 초도 자금 없이도 가능해.”

 수경의 눈이 동그레 지고 귀가 번쩍 열렸다. 늘 일할 기회가 있을 거라 하더니 영순은 작정을 한 사람처럼 A4용지 위에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그녀는 종기를 설득할 멘트까지 준비해 주었고, 혹시 자금 문제가 생길 때 시댁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시댁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관계를 좀 풀어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육아와 가사 문제도 그녀의 말대로라면 별 문제 될 게 없었다. 수경은 지영순의 치밀함에 놀라면서 그녀의 제안이 무조건 다 마음에 들었다. 이미 일을 시작한 듯한 흥분에 빠져들었다.

 그날 자정이 넘어 귀가한 종기에게 수경은 말문을 열었다.

 “태영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제영이도 젖을 떼고 나니 시간이 너무 많아. 내가 일을 시작하면 어떻겠어?”

 종기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수경은 내심 안달이 나서 지영순의 말대로 연민을 자극하는 모드로 다가갔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너무 쉽게 그만둔 것 같다, 생활이 안정되면 예쁜 가게를 하나 내주겠다고 한 종기의 약속을 들먹거리며 자신의 꿈이 너무 멀어지고 있는 거 같아 삶에 의욕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지금은 좀 그래. 조금만 기다려봐.”

 종기의 대답은 예상했던 거였고 수경은 신속히 세 번째 카드를 내밀었다. 이 상황에서 가게를 얻는 건 무리고 육아나 가사에 지장을 덜 주면서, 당신이 재기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 이 집을 매장 삼아 홈 세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종기는 수경을 빤히 쳐다보더니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머리를 끄덕였다.

 

 종기에게 허락을 받아 “마담”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하면서 지영순도 백화점을 그만두었다. 지영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경이 간절히 부탁을 했다. 업체별 디자인 선정, 매입 물량과 단가 조절, 판매 물 대 결제조건, 재고정리에서 반품처리까지 모두 지영순이 섭외하고 조율했다. 뿐만 아니라 부엌살림과 육아는 물론 고객 유치까지 그녀가 맡았다. 그렇게 최소 1인 5역을 하면서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오히려 늘 수경을 위로했다. 그녀는 엄마 같고 언니 같고 남편 같았다.

 “생강차 한잔 마셔. 옷 먼지 속에 사람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몸 관리 잘해야 해.”

 “언니가 힘들지, 난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만 올리고 있는 걸 뭐.”

 “너의 인성이 좋아서 늘 사람이 옆에 끓는 거야. 백날 자리 깔아줘도 못 챙겨 먹으면 소용없어. 내가 괜히 들쑤셔 널 고생시키나 싶어 짠할 때도 많아. 쉬엄쉬엄 천천히 해.”

 백화점 고객들이 “마담”집으로 와 옷을 사 입었고 수경은 한번 고객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고객을 꼬리 물고 와 고객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밥을 먹을 시간조차 없을 만큼 하루 종일을 옷과 사람과 씨름을 했다. 1년이 채 안돼서 지영순의 업무를 수경도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 수경의 꿈이 한 발짝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았다. 지영순은 수경의 세 번째 은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엄마, 나 오늘은 뭐 입고 가요?”

 주방 식탁 앞에 커피 한잔을 빼들고 멍하니 넋이 빠진 채 앉아 있는 수경을 끌어당긴 건 다섯 살이 된 제영이었다.

 ‘오늘도 시작되는구나!’

  “엄마 엄마~”

 수경은 세탁실에 있는 입주도우미 방 씨를 불렀다.

  “오늘은 세 팀이에요. 오전엔 서초동 사모님 일행과 음... 사업자 미팅... 아니 태영 아빠도.... 아이들 내려오지 않게 신경 쓰시고, 열두 시 삼십 분에 나까지 다섯 명 식사 준비해주시면 돼요. 으음... 엄마가 한 잔치국수 먹고 싶어 하니까 묵은 배추김치랑 내셔요. 딴 건 크게 신경 쓸 거 없고 음... 고구마나 좀 쪄놓고 과일 챙겨주고..... 인터폰 하면 가지고 오셔요. 아냐, 내가 올라올게 준비만 해 두셔요.”

 수경은 평소 방 씨에게 하는 말투가 아니고 자신의 머릿속에 리마인드 하듯 웅얼웅얼 더듬거리며 입속말을 했다.

 며칠 전, 지영순이 종기에게도 일을 주자고 제안을 해왔다. 어영부영 종기의 실업 상태가 5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는 종기와 수경이 첫 만남 때부터 봐 왔으니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수경아, 태영 아빠를 언제까지 저리 둘 거니? 괜찮은 사업이 있어. 초기 투자비가 없으니 위험부담도 없고 제영 아빠에게 잘 맞는 일일 거 같다. 사업자랑 같이 한번 보자. 자리 만들어봐.”

 반가운 제안이고 지영순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랐지만 이번만은 왠지 좀 꺼림칙했다.  

  

 “어머, 사모님 오셨어요? 여전하시네. 이쁘다, 역시 멋쟁이는 다르다니까. 이거 작년에 저의 집에서 사신 거죠? 새 것같이 입으셨네 호호호...”

 “어머 사모님은 손을 어쩌다 이러셨어요? 오른손이라 불편하시겠는데? 언제 다치셨어요?”

 수경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이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수경이예요. 영순 언니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언니랑 비슷한 연배인 줄 알았는데 언니보다 많이 젊고 이쁘신 분이군요. 앞으로 잘 봐주셔요.”

 “영순이랑 동갑입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조 사장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배윤희예요..”

 일상적인 대화의 타이밍보다 한 템포 앞서 들어와 말을 받았다. 하지만 날이 서있지 않고 부드러웠다,  

 수경의 촉촉했던 눈이 금세 분석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배윤희....., 그대도 보통은 아니시군.’

 “언니 왔어? 차 막혀서 힘들었지? 주차는?”

  수경은 아침 일찍 강남 일대를 돌아 일행을 모아 온 지영순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자 앉으셔요. 아침식사는 하시고 오셨어요? 나중에 맛있는 잔치국수 해드릴게요. 우선 차는 뭘로 마실까요?”

  수경의 말이 빨라 그들 중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수경은 인터폰을 들고 방 씨에게 크림 뺀 커피 둘, 녹차 하나, 생강차 하나, 왕풀빵 한 접시를 주문했다.

 “그리고 태영 아빠 오면 알려주셔요.”

 

 하이모닝은 지영순의 말대로 종기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회사가 사원을 상하가 아닌 파트너 관계로 보고, 사원들의 실적을 그들의 재산으로 영구 귀속시켜 나누는 삶을 살겠다 한 캐치프레이즈가 일반 기업과 다르다며 마음에 들어 했다. 수경이 보기에도 시대적 흐름과 국내 소비패턴에 잘 맞게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인터넷이 바쁜 현대인들의 쇼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건 충분히 예견된 현실이었다. 무국경, 무점포 시대를 접하는 게 아직은 낯설고 쉽지 않지만 이미 검증된 해외의 몇몇 사이트들은 회원가입만으로도 원하는 상품을 간단히 구매할 수 있어 신기해한 적도 있었다. 배윤희, 이철민은 하이모닝 사업의 초기 멤버이자 최고 직급에 있는 부부 사업자였고 종기의 파트너이자 스폰서가 되었다. 그가 몇 번 보고 바로 이철민과 ‘호형호제’하고 배윤희를 형수가 아누님이라 부르는 건 보기 드문 친밀감의 표현이었다. 종기는 일과 사람, 둘다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고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엄청났다. 처음에는 파트타임을 통해 부담 없이 사업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던 그가 심도 있는 사업자 트레이닝을 받고 있었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처럼 몰입해 있었다.  

  

 수경은 주말도 없이 매일 서너 팀씩 예약제로 고객을 받고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하루 10~12명과 부대끼고 나면 밤늦게는 거의 실신 상태가 되었다. 백화점 매장과는 다르게 식사를 비롯한 기타 음식 및 간식을 제공하는 홈파티 형태의 세일이다 보니 한 팀당 기본 서너 시간씩 머물렀고 마지막 팀들은 늘어지기 일쑤여서 보통 자정이 넘어야 정리할 수 있었다. 수경이 처음부터 규칙을 정하지 못한 잘못도 있지만 “마담”을 만든 사람들 대부분이 특별한 지인들이 매개가 된 소모임이다 보니 고객으로만 대할 수도 없었다. 어떤 때는 수경을 카운슬러나 해결사처럼 밤새도록 붙잡고 자기들의 신세 한탄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룹 매출이라 액수가 큰 장점도 있었지만 여러 의견이 분분하여 세일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태영이가 중학교를 들어가자 홈 세일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2층이 분리되어 있는 공간이긴 했지만 수다 소음이 만만치 않았고 학습에 몰입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돌았다. 종기도 일 핑계로 외박하는 날이 많아졌다. 일의 특성상 사람과 만나다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결백증이 있는 그가 이철민 배윤희 부부 집에서 같이 잔다는 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수경의 삶에 촉매제가 되어준 건 사실이지만 이러다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게 아닌지 더럭 겁이 났다.더  늦기 전에 가족들을 품어야 할 것 같았다.  

  수경은 가정을 정상화하는 일부터 하자고 지영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음에 드는 매장을 구해 옮기고 집도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보다 아늑하고 예쁜 집에서 그동안 일 때문에 소원했던 종기와의 관계도 개선하고 아이들과도 일과 분리하여 제대로 엄마 노릇을 하고 싶었다. 매장과 집을 동시에 인테리어 하면서 수경은 두 번째 점프를 한다는 느낌에 감정이 느꺼워졌다. 이번엔 순전히 자신의 노력에 의한 성과물이란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벅찼다.  

 

 그들의 이상한 동거가 수경의 육감을 넘어 현실에서 감지된 건 매장을 오픈하기로 한 전날 밤이었다. 지영순을 보내고도 한참을 사은품과 각종 행사비품들을 정리하는 바람에 새벽녘에야 귀가하는 길이었다. 집 앞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에 낯선 차가 주차되어 있어 집 뒤쪽 놀이터 한편에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옆집 골목 안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수경은 숨을 죽이고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둡긴 했지만 너무도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인기척을 느낄 법도 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몰입해 있어서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커다란 종기의 품에 배윤희의 몸 전체가 풍성한 머리카락을 제외하고 푹 감싸여 있었다. 수경은 너무 놀라 소리를 쳤지만 모기소리만큼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휙 돌아 몇 걸음 집 쪽으로 걸어갔다. 대문에 기대어 가슴을 누르며 숨 고르기를 했다. 그때였다. 수경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건너편에 이철민의 차가 서 있었고 분명 그 안에는 이철민이 있었다.

 수경은 성큼성큼 내달려서 이철민의 앞으로 갔다.

 “당신들 뭐야?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철민은 몹시 당황한 듯 어어 소리만 냈다.

 수경은 이철민의 멱살을 잡고 차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당신 마누라가 저기서 뭘 하는지 당신 눈으로 봐.”

 이철민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종기가 수경을 붙잡고 있었다.

 “놔! 여자는 어디 갔어? 다 나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알 수 있게 말해봐.”

 수경은 종기의 손을 뿌리치고 이철민과 번갈아가며 가슴팍을 쳐댔다.  

 “그만해. 이미 알잖아? 너와 나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는 사실을. 나 때문이 아니야. 내가 스스로 그 여자를 만났니? 네가 날 그 여자에게 떠넘긴 거 아니야? 내가 널 만난 건 너에게만은 절대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너 역시 날 그림자 취급했지. 너는 모르지? 무시당하며 산 것들은 무시하는 것도 익숙하다는 걸.....”

 배윤희가 도로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수경은 그쪽으로 뛰었다. 종기가 따라오면 말했다.

 “그 여자를 다치게 하면 너는 내 손에 죽어. ”

 순간 수경은 다리가 풀리면서 제 자리에 고꾸라지듯 넘어졌다.   

 “여태 유일하게 나를 인정하고 내 가치를 알아주는 여자야. 난 이제야 내가 사람으로 사는 것 같아..”

 종기는 넘어져 있는 수경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낮은 목소리였지만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너의 욕망은 뭐지? 충족됐니? 내가 좀 채워줬니?”

 너무 먼길을 와버렸다는 생각이 차가운 아스팔트의 기온보다 더 차갑게 뇌리를 쳤다.

  

 겨울의 밤은 너무 길었다. 수경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꼼짝도 않고 있었다. 몇 시나 됐을까? 인기척이 들렸다. 수경은 숨을 죽였다. 종기였다.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뭐지, 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스스로 미쳐 나가길 원하는 걸까? 저 사람의 저의는 무엇일까? 무섭다. 근데 저 사람은 무엇을 잘못한 거지? 사람들은 내게 시집 잘 가서 남편 덕에 사는 주제에 분수도 모르는 년이라고 말할까?’

 수경은 잠깐이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영원히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종기가 불을 켰다.

 “왜 그러고 있니?”

 “뭐가 뭔지 모르겠어. 말 좀 해줄래?”

 종기는 수경을 부축해서 침대로 갔다.

 “.........”

 “.........”

 침묵이 흘렀다.

 종기는 수경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목구비에 눈을 맞춰 내려갔다. 조금 전 아스팔트에 넘어진 자국이 그대로 있는 옷도 하나씩 정성스럽게 벗겼다. 수경이 움찔했다.

 “가만히 있어봐.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 우리가 18번째 맞는 크리스마스.”

 아... 크리스마스!

 매장을 오픈하는 날이란 생각만 있었지 크리스마스는 여러 번 듣고도 곧 잊어버렸다.

 종기도 옷을 벗었다. 불을 훤히 켜 둔 채로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노력하지 마라. 네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없어. 특히 나에겐.... 너에게 내가 그림자였듯 너도 내게 그림자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너와 나는 다른 공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종기는 분명 행위를 했다. 수경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정도 했다.

 “너에겐 사정을 해도 눈곱만큼의 감흥도 없어. 그 여자는 쳐다만 봐도 내 심장이 뜨거워지고 전율이 흐른다. 네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거, 이제 알겠지?”

 종기의 목소리는 하염없이 부드러웠다.

 

 "내 인생은 결혼과 동시에 멈춰버렸어요. 공백이죠. 아무것도 표현할 게 없는 긴긴 시간. 백지예요. 나는 뭐였지? 뭐였을까요? 온통 위선과 허위. 머리로만 살았어요. 20년을 도깨비감투를 쓰고 투명인간으로 살았어요. 깨질까 봐 그것만 두려웠어요. 다시 과거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어요. 난 늘 과거 속의 나로 살고 있었는데 그걸 몰랐단 말이죠. 심장이 없는 사람을 아시나요?

 지형이 예상한 대로 강동희와 한 조였고 오늘 프로그램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거였다. 상대를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받은 상처를 모두 다 뱉어 버리라고 했다. 우는 자와는 함께 울어줄 수 있고 즐거운 자와는 함께 즐거워할 수 있도록 상대에게 친밀감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다른 것에 의지하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동안 부질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고 했다. 하나님만이 온전한 친밀감을 줄 수 있어 나도 남도 치유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지형은 지금 하나님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 몸으로 받은 상처부터 치유하자.”

 지형의 주절한 넋두리를 듣고 일곱 살 적은 동희가 가슴을 열며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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