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은 신의주 남쪽 지역에 있는 동네 이름.'박시봉'은 시의 문맥에서 화자가 세 들어 산 집주인의 이름이며, '방'은 편지에서 세대주나 집주인의 이름 아래 붙여 그 집에 거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시의 제목이 마치 편지봉투의 발신인 주소 같다.-문학동네 백석 시집 정본, 고형진 엮음 179p-
나는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옛날 다이어리 사이에 끼워둔 편지 한 통을 찾기 시작했다.
"인천시 남구 용현1동 190번지 25통 5반 (황기식) 씨방 조영길!"
1985년 1월 11일 인천우체국 직인이 찍힌 편지다. 맞다. 그때도 그랬다. 그는 제대하고 복학을 한 후부터는 개인 주소지로 편지를 보내왔다.
1983년 여고 1학년, 담임선생님이 내가 문예반에 있다는 이유로 "국군장병 아저씨"께 대표로 위문편지를 쓰게 했다.당시 부산 다대포에북한군이침투해 그들이 소탕을 했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1인에게내 편지가 위로와 격려가 될거라는 거였다.
어떻게 썼을까? 얼마나 많은 미사여구가 붙어갔길래 얼마후 담임선생님은 교무실로 날 불러 그의 답장을 전달했다. 그 편지를 주면서 엄청 생색을 냈던걸 기억한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지만 내 행실을 믿을 수 있고,미지의 국군 아저씨도 답장 내용으로 보아 건실한 청년이며무엇보다 글씨체가 너무 좋아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내게 진 빚을 편지로 대신한 게 분명했다(호구조사격인가정통신문에 아버지가 음악에 관련된 직업을가진 사람인 걸 알고 자기 아들 기타를 사달라고 부탁하더니 당시 7만 원을 떼먹었다. 철떡 같이 주겠다 하고 부탁한 일이라 한동안 아버지께 미안했다 ).
그 시절 '펜팔'이란 게 있었다. 학생잡지나 주간지, 키타 교본이나 가요책 뒷부분에 취미, 나이, 학교,직업,원하는 관계(친구,이성친구,오빠동생 등) 등을 밝히고 주소까지 쓰면(간혹 사진까지 싣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라도마음에 드는 이력을 보고 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었는데 몇 번씩 편지가 오간 후엔 그들이 원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말 그대로 우편제도를 이용한 교제 시스템이었다. 오늘날 메일이나 카톡,SNS시스템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디디 더딘 통로였지만 거기서 많은 역사가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답장을 받고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을 꽤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집적거렸던 건당시엔펜팔 대상을 가진 것이친구들 사이에 은근자랑거리였기때문이었다. 담임선생님 말대로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 편지 한 통에 서너 통의 빈도로 여섯 살 많은 어른답게(?) 수험생이던 나를, 내가 처음 그에게 그랬듯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인천사태로 정국이 시끄러울 때 전화도 한번 받은걸 보면 집주소는 물론 전화번호도 알려 줄만큼 믿음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군복무시절의 사진 한장을 편지에 넣어준걸 아직 가지고 있다)과 몇 년간 이런저런 사연을 담아 편지를 주고받은 건 지금까지 내 인생에 커다란 추억이 되어있다. 그에게 온 마지막 편지가 1986년 5월 내가 재수를 할 때 일본 어학연수를 가 있을 때였고, 예민한 당시 상황상 더 이상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때는 내가꽤소심하고 폐쇄적이었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에게 두려움,남자 친구가 생겼고나이가 많은 아저씨 느낌에서 오는 거리감 등등 글씨체나 문장을 보면 지금은 당장 만나고픈 사람인데 왜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는지 한없이 아쉬울 뿐이다.
"84년도 한 해를 나야 어차피 맡은 바 군 생활을 했으니 별로 후회랄 것도 없고 잘한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제일 후회되는 건 은정이와 미리 약속을 정하지 못하고 그냥 상경해버린 것."이라면서 "언젠가 만나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과감하게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동생이 되어 주길 바라."라고 썼다. 그런 기회가 이제라도 온다면 무조건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다.
일본 연수 가서 쓴 편지가 마지막이었다. 우측은 나와 몇 번 편지를 주고 받은 후 보내온 그의 사진. 그땐 한없이 낯설었는데.지금은 꽤나 친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