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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궁은정 WiseFrame Jan 09. 2019

지금 여기에서 풍족하다

지금 풍족하다고 결정합니다

가난은 장난이 아니다. 돈이 없는 것은 사람을 참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비가 새고, 문풍지 구멍으로 바람이 숭덩숭덩 들어오는 집에서 산다는 것. 곰팡이와 바퀴벌레가 가득한 집에서 먹고, 자고, 씻고 하는 일상이 얼마나 눅눅하고 지겨운지. 


돈이 없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내가 하기 싫은 일까지 맡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유롭지가 못한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돈 버는 것에만 붙들려서 일상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그래서 돈 버는 일에 그리 열중하지 않았다. 최대한 자유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니까. 일 안 하고 많이 놀러 다녔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가난을 면한 길이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놀러 다녔는데도 계속 놀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돈이 없으니까, 돈 없이 노는 방법을 많이 터득했다.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는 무료로 관람을 할 수가 있었다. 수시로 좋은 전시를 다양하게 해서 볼 거리도 많았다. 교보문고에 가면 하루종일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문화일보 객원기자를 했을 때에는 기자 시사회에 초대되어서 거의 매주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었다. 정동 돌담길을 걸으면 참으로 운치가 있고 좋았다.  

세종문화회관 앞의 너른 계단에 앉아 있으면 괜히 멋들어져 보였다. 한 번은 안에 들어가서 엄청 멋진 공연을 본 적도 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이었는데, 뮤지컬 공연 중에서는 대형작이다. 이걸 아는 사람에게 티켓을 공짜로 얻어서 볼 수 있었다. 

주말에는 김밥 한 줄 사서 북한산에 올랐다. 새벽에 오르면 오전 시간은 후딱 지나갔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과 산 아래서 맛있는 것도 사먹으면 그 날 하루가 다 지나갔다. 대개 산에 오시는 분들이 어른들이라 먹을 거를 거의 사주셨다. 안 되면 절에 들어가 밥을 얻어 먹은 적도 있다. 

그 밖에도 돈을 들이지 않고도 놀 수 있는 것이 여기저기 많이 널려 있었다.  


지금은 가난하지 않다. 너무나도 가진 것이 많고 풍족하다. 어느 정도 생활의 기반을 잡고 나니 살맛이 난다. 매달 다가오는 월세 걱정, 카드결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안도감을 주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절대적인 수입이 늘어났지만 지출도 따라서 늘어났다. 부모님 용돈에, 아이들 양육비, 각종 공과금과 보험, 주택 유지비 등으로 쏠쏠하게 돈이 나간다. 수입은 늘었지만 쓰는 것도 많아져서 무엇이 더 풍족한 것인지 사실 햇갈리는 때도 있다. 

백만원도 못벌어서 빠듯한 서울 살이를 했지만 많은 시간을 유유자적 거리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때가 더 부자였을까. 몇 백의 수입을 얻고 40평대 아파트에 차를 끌며 살지만, 매일 혼자 있는 시간을 내지 못해 글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지금이 더 부자인가. 참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눅눅한 집에 들어가 사는 건 정말 싫다. 하지만 돈이 수중에 있으니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고 머리를 굴리며 살아가는 것도 지루한 삶이다. 결국은 돈이 있든 없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삶을 살아가게 되고, 무엇이 더 나은지는 정하기 어렵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풍족하다고 결정하면, 그것으로 풍족해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성경에서 매사 감사하라고 하는가 보다. 감사한다는 것은 지금 처한 나의 여건이 풍족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풍족하다고 생각하고 돌아보면,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주체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더 부자가 되지 않아도 너무 많은 것을 즐기고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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