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궁은정 WiseFrame Jan 09. 2019

지금이 가장 시작하기 좋은 때

내가 보낸 시간은 내 인생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겪게 되었다. 함께 공부하던 후배와 선배, 지도 교수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그 죽음이 가슴 속에서 앙금으로 남아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아프게 가슴을 찔러 댄다. 가만히 살다가 문득 문득, ‘그들은 왜 죽었을까?’를 떠올리곤 한다. 더 많은 시간 함께 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가장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한 것은, 암에 걸리셨던 어머니를 곁에 두고 모셨던 3개월 동안이었다. 환갑이 넘었지만 팽팽한 피부를 가지시고, 입을 크게 하고 환히 웃으시던 분. 병색이 짙어지자 그러한 얼굴은 온데 간데 없고, 바싹 마르고 초췌하고 그러면서도 퉁퉁 부은 그런 모습으로 차츰 변해갔다. 


좁은 방에 그런 어머니와 임신한 내가 아주 가까이 마주앉아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이미 정신이 혼미하고 말소리가 나오지 않아, 서로 대화를 나눌 수조차 없었다. 침묵을 깨기 위해 틀어 놓은 TV에서는 하루 종일 몇 개의 예능 프로그램이 반복되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세계를 돌아다니고, 즐거운 일상을 보내며 웃었다. 이렇게 삶이 다를 수 있구나. 


어머니는 병이 다 나으면 교회에 가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이미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교회 봉사를 다니는 것은 꿈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셨다. 나는 어머니께서 암이 생겼다는 것을 안 이후, 그래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그렇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롭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터를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동안 하던 습관을 버리고, 공간을 버리고, 수입도 버려야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 또한 그분의 선택이니까 말이다. 전혀 새로운 곳에서 낯선 사람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맞딱드리고 싶지 않으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제는 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머님의 죽음을 옆에서 목도하면서 내가 보내는 이 시간이 언젠가는 죽음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끝나는 것이 이 인생이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도 언젠가는 흘러서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중에 하지’. ‘언제가 되면 하지.’ 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졸업을 하고 나면, 논문을 쓰고 나면, 상황이 더 나아지면, 아이가 더 크면… 이렇게 해야할 일을 나중으로 유예하다보니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자꾸 미뤄졌다. 

이렇게 내가 살고 싶었던 일을 나중으로 미루며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상태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없다는 미진함 때문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포기하고 미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내내 시간을 쏟아버리곤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고 징징거리거나, 심지어는 상황이나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나를 속이는 짓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지금 여기에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본다.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오랫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책쓰기를 밀어내듯이 하고 있다. 맨 처음에 아이들을 재워놓고 새벽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점차 새벽에 작업 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밤에 이렇게 혼자서 글쓰기 작업을 하는 시간에는 내 인생을 보내는 것 같아 행복하다. 이렇게 쓰고 나면, 낮 시간 동안에는 미친듯이 깨달음이 몰려 온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생각했었던 것인지, 예전에 흘러간 그 일이 나에겐 어떤 의미였는지 되새겨 보게 된다. 그 생각으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시 새벽에 글을 쓴다. 흩어졌던 마음이 모아지고, 오로지 글의 내용에 집중을 하면서 나는 하루하루 더 영글어간다. 나는 이렇게 나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내가 죽는 마지막 날을 상상해 보았다. 한나 아렌트의 책에 적히 저자 소개를 보니 이렇게 적혀 있다. 


“이후 1970년부터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남겨놓았던 사유, 의지, 판단의 정신적 활동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3부작의 마지막 부분인 ‘판단’ 부분을 구상하고 집필하던 1975년 12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한나 아렌트 저, 1958, 이진우, 태정호 역, 1996. 인간의 조건, 한길사. 책 날개에서).”


나와 아렌트를 등치시키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적힌 부분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는 마지막 죽을 때까지도 집필할 거리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작업의 와중에 죽음을 맞이 한 것이다. 

내가 죽게 된다면, 어떤 아이디어 구상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장마비라면 더 좋을 것 같다. 임신을 하고 태아로 인정을 받으려면 심장소리를 들어야 한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마지막 갈 때에는 심장이 멎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심장이 뛰고, 심장이 멎는 그 중간의 시간. 이제는 나를 소비하는 것보다는,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것, 내 생의 의미를 완성해 주는 일들로 보내고자 한다. 나중에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지금이 가장 충분하고, 시작하기 좋은 때이니까 말이다. 

이전 09화 자격인가 능력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