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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궁은정 WiseFrame Nov 02. 2019

나는 나에게 소속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소속이 없어졌다. 엄청난 공허감이 몰려왔다. 아마도 직장에 다니다가 육아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던 사람들도 나와 같은 심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박사논문을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것도 소속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한몫했다. 그러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졸업을 했다. 그리고 나는 진정한 무소속이 되었다. 그랬더니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돛단배처럼 어디로 갈지, 어디론가 갈 수는 있을지 몰라 서성거렸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 수렁에 빠져 버렸다. 결과도 나오지 않는 일에 시간을 쏟고, 물건을 사들이고, 여기저기 모임에 기웃거리고… 


그러다가 나는 아예 나만의 회사를 차려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내가 나를 소속시키리라 결심을 한 것이다. 회사 이름도 짓고, 로고도 만들고, 명함도 팠다. 블로그,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결심은 꽤나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멋있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주는데 무슨 소용인가. 심지어는 나조차도 내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뭐하는 짓인지 의심을 했다. 이름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가 부끄러웠다. 도대체 아무것도 없는 이 회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이밀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회사 이름을 내 입으로 내뱉는 것조차도 어색하고 말이다. 


와이즈 프레임 Wise Frame. 내가 내 회사에 지어준 이름이다. 이름을 짓는데 고민을 많이 했다. 고통스럽기도 했다. 생각해 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이 이름 지을 때와 비슷한 기분. 아이가 나올 때가 다 되었는데, 세상의 모든 이름이 다 이상한 것 같고, 거기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 지나가는 모든 단어에 아이 이름을 맞춰 보았다. 지나가는 간판이나 도로표지판에서도 아이 이름을 찾았다. 그런데 매번 선택 장애에 부딪혔다. 결국 아이가 나왔고, 출생신고를 해야 하니까 하나 마음먹고 정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아이는 계속 불리고 있다. 아이의 정체성에 자신의 이름이 큰 차지를 할 텐데, 그걸 감히 내가 지어주어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내가 낳았고 내가 엄마인데, 내가 결정을 지어주는 것이 맞는 거 아닌가. 나에게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 이름은 그래도 남편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출생신고를 하면서 최종 확정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 회사는 나 홀로 만들고, 내가 이름 짓고, 그 이름이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계속 부정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이름만 걸어 놓은 거야’, ‘이걸로 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나 자신부터 자신 있게 내가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식을 낳아 놓고도 탄생을 인정하지 않고,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곳에 진정으로 속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겉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명백하다. 이곳에 내가 전적으로 몰입하고 헌신하지 않은 까닭이다. 내가 온전히 이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체력을 모두 쓰지 않고, 그저 표면적으로만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든 그렇다. 가까운 예시로 결혼이 그렇다. 결혼은 결혼식과 서약, 가족 행사, 가족에서의 역할과 같은 사회적인 약속으로 통해서 굴러간다. 보이는 것을 어느 정도 충족하면서 결혼은 그럭저럭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가족에 진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온전히 내놓는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가족은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된다. 


내 사업에 나는 이렇게 나를 내어놓고 헌신했는가. 내가 온전히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곳에 제대로 속하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인 나는 어떤가. 엄마로 나는 온전히 속했던가. 아이를 최선을 다해서 사랑으로 돌보았는가. 아이를 키우면서 느껴지는 고통과 기쁨을 몸으로 가득 느끼면, 엄마와 자식 관계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나에게, 나의 삶에 온전히 몰입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러한 죽음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언제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명확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대로 살아보지도 않고 ‘살까, 죽을까?’를 고민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 선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죽어버릴까를 고민하는 것은 진짜 죽을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것이 힘들어서 도망치는 구실을 찾는 것일 뿐이다. 진짜로 엄청난 삶의 모순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의 삶에 온전히 나를 내던지기를 거부하고, 겁을 내고, 피하는 것은 좀 아쉽다는 것이다. 


내가 여태 붕뜨고, 겉도는 것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은 내 삶에 온전히 몸을 담그지 않아서였다. 내가 나 자신이 부끄럽고, 내 사업이 부끄러웠던 것은 그 안에 푹 나 자신을 담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배신당하지 않을까, 상처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정말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실체가 없다. 크게 잃어버릴 것도 없으면서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힘들었던 것인지 의아해질 정도이다. 


사회에서 정해주는 테두리가 없다는 것, 학교나 회사, 집단에 소속이 되지 않은 상태는 여전히 힘들고 걱정이 된다. 이것은 속수무책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어이없는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련 앞에서 상하고 쓰러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의 삶에 완전히 다이빙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삶에 속한다. 사회에서 주어주는 소속이 없더라도 괜찮다.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온전히 헌신해도 파산하거나 상처입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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