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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궁은정 WiseFrame Nov 02. 2019

나에게만은 솔직해야 한다

아주 최근에 오랫동안 나를 참으로 많이 속여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없고, 나 자신이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달렸던 것이 나를 속이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전, 나는 ‘솔직한 말하기’라는 책을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쉬운 주제라고 생각하고 얼른 써 버려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결코 만만치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여러 가지 현상을 이해해야 했다.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내가 탐색했던 주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언어폭력(학대), 공격적 언어, 정서적 협박, 타인 조종, 나르시시즘, 불안, 권력, 악, 또라이, 자기기만, 게으름…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내 눈 앞에 떡 하고 나타났다. 솔직한 것에 대해 알려고 했더니 속임수나 거짓말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다. 거짓은 참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연관 단어들을 몰고 다녔다. 


그런데 이러한 피하고 싶은 단어들의 한가운데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속이고, 그러해서 남도 속이게 된 거짓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속이는 일은 알면서도 일어나고 모르면서도 일어난다. 의도했든 아니든 거짓은 현실 속에서 영향을 미친다.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의도적으로 책을 펴지 않고 노래방에 가면 시험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내 얘기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시험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의도치 않게 공부하기 위해 머리를 쓰지 않는 것이다. 둘 다 성적이 안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땡땡이를 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 죄책감도 느끼고 반성도 하게 된다. 어쩌면 선생님한테 걸려서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겉으로 노력하는 척하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결과가 안 나왔으니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하면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아예 사라져 버린다. 진짜로 주어진 한계로 인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닌데도, 그런 척하면서 슬쩍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뒤로 미루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를 속이면서, 속이고 있다는 것조차도 속이고 있는 상황이다.


국부론을 써서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린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선택을 하는데, 그것이 이기적으로 보일까 봐 두려워서 다른 말로 합리화를 한다고 한다. 자신의 욕심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드러나면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처세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명하게 사회를 살아가는 기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합리화하는 것이 익숙해지면, 나 자신에게 조차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속이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토대로 매 순간 선택을 할 것이고, 그것이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거짓된 인생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 


“자기기만은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혼란의 절반은 바로 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알기만 해도 자기기만이란 맹점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기만을 계속 방치한다면 결국 우리는 거짓된 자기 모습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 |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 세계사 | 98쪽 |)



내가 나를 속여왔던 부분 중 하나는 게으름에 대한 것이다. 게으른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 거짓말의 대부분은 내가 왜 안 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젊은 시절 월세 낼 돈이 없는 것, 매일 졸리고 피곤한 것,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것, 자유롭게 책을 쓰지 못하는 것, 심지어는 원하는 몸매를 갖지 못하는 것까지도 모두 다른 사람, 상황, 세상의 부조리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될 수 없는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그 이유를 차곡차곡 모아 놓았다. 나는 그 이유들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많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면 나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무언가를 열심히 시도하고 있었다면, 안 되는 상황에 대해서 그리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그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움직이기 싫었던 나는 안 되는 이유들을 생각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그다음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착한 척, 괜찮은 척했던 것이다. 앞에서도 썼었는데, 괜찮지 않은데 미움받기 싫어서 소외되기 싫어서, 웃지 않아도 될 사람을 향해 웃고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허용했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어른들 속에서 내 몫을 챙기기 위한 전략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성인이 돼서도 나의 경계선을 지키지 못하고 계속 선을 넘어오도록 하얗게 웃으며 허용한 결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더 좋지 않아 졌고 나는 나로부터 고립되었다. 진정한 외로움은 아마도 여기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반대로 마음에도 없는 독한 말을 던져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도 많았다. 위악을 떠는 것이다. 일부러 상대를 미워하지도 않고 거칠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과도하게 비판적으로 날 선 말을 던질 때가 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내가 내뱉은 말로 인해 내가 베인다. 이것은 겁이 많은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던졌던 독침이었다. 나를 상하게 하면서까지도 상대를 공격해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더 커 보이고 부풀어 보이니까 말이다. 결국 나의 독설은 상대를 공격할 의도도 없고 상황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는 상관없이, 결국 나를 향한 독백에 불과했다. 


착한 척하는 것도, 나쁜 척하는 것도 사실은 세상을 향해 펼친 나의 방어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어막을 치기 위해서는 위장전술이 필요하다. 진실이 무엇인가 보다는 얼마나 효과적으로 바깥에서 들어오는 상처를 잘 막아내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심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더 좋게, 혹은 더 독하게 말을 했다. 둘 다 모두 거짓말이다. 


왜 그렇게 방어막을 쳐야만 했을까? 나는 나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바라보는 데 꽤나 능숙하지 못했다. 불편하고 상처 받는 경험은 지극히 고통스러웠고, 꽤나 이런 상황을 피해 다니려고 했다. 일부러 고통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 고통이라는 것이 상상했던 것처럼 거대하지도 공포스럽지도 않은데, 엄살 부리며 더 크게 생각한 면도 없지 않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힘들어했나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도 많다. 삶의 중요한 국면에서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힘든 순간을 눈 질끈 감고 넘기다 보니, 그러한 공포심이 많이 줄어든 것이다. 슬슬 ‘가드(?)’를 내리고 직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괜찮은 일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나 자신에게 수없이 거짓말을 하고, 나를 속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예전에 나는 항상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나는 항상 부적절한 자리에 서 있는 듯했고, 사람들 속에 있어도 외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있을 곳에 있고, 함께할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느낀다. 마음의 공허함이 가시고 어디로 떠나고 싶은 충동도 많이 줄었다. 


거짓된 삶의 한가운데에서 어쨌든 나는 나를 돌아보려고 한껏 노력했다. 그중에서도 글쓰기는 내가 거짓말에서 벗어나 마음의 진실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공허할 때, 우울할 때, 화가 날 때… 무언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면, 언제나 폭발적으로 글을 써대곤 했다. 책을 쓰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기획되지 않은, 나 혼자만을 독자로 하는 글이었다. 그렇게 쓰고 쓰고 쓰다 보면, 내 마음이 가닿고자 하는 곳이 어딘지 끝내 알 수 있었다. 수년이 걸린 적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나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공부는 삶의 진실성을 찾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졸업장을 따기 위해, 스펙을 쌓기 위해 학업을 계속했더라면, 나는 그 지난하고 불안한 과정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불편한 모습을 감당하도록 해 주었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게 해 주고, 삶에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학교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과 오랜 시절 같이 걸어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책도, 강의도, 사람도 모두 나의 스승이었다. 

그들은 거짓으로 위장된 것들은 언젠가 다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삶의 고통으로 되돌아 갈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다. 깨달음이 있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주 오랫동안 ‘참된 너로 살아가라’고, ‘차분히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한 목소리를 무지함 때문에 듣지 못하다가, 공부하고 책 읽으면서 조금씩 바람결에 듣게 되었다. 그 목소리에 이끌려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고, 내 자리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바쁘게 흘러가는 생활 속에서도 잠깐잠깐이라도 글 쓰고, 공부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들은 내가 거짓된 삶을 살지 않도록 나를 많이 지켜 주었다. 앞으로는 더욱더 나에게 솔직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에게도 진실되게 표현하고 싶다. 방어막을 세우지 않아도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자신을 진실되게 드러낼 때 내가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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