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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궁은정 WiseFrame Nov 02. 2019

나를 잊으면 세상을 얻는다

나를 특별대우 하지도 하대하지도 않는다

선생에게는 네 가지가 전혀 없었다. 


첫째, 억지로 하는 일이 없었다.

둘째, 이것만은 꼭 해야겠다는 결의가 없었다.

셋째, 고집하는 것이 없었다.

넷째, ‘나’라는 의식이 없었다. 

(논어 자한 편, 9:4)

(배병삼, 논어, 사람의 길을 묻다, 사계절 출판사 번역본에서 발췌)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이 구절을 발견하고 얼굴에 슬몃 웃음이 번져 나왔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라서 말이다. 내가 딱 이렇게 살고 싶었었는데 말이다. 이 중에서도 나는 마지막 넷째 항목은 자주 떠올리곤 한다. 공자는 ‘나’라는 의식이 없었다는 것. 다른 해석본에서는 ‘나를 앞세우지 않는다’라고도 한다.  이 해석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나를 앞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다는 것은 유교 사상에 잘 맞는 예의를 지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배병삼의 ‘논어, 사람의 길을 묻다’라는 책에서는 “’나’라는 의식이 없었다”라고 풀이했다. 이 말을 처음 읽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동안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찾아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다. ‘아름다운 이기주의자’, ‘나를 사랑하자’, ‘내 마음대로’ 등의 광고 카피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나에게 이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항상 나라는 알 수 없는 존재를 찾아서 많은 시간을 보내왔는데, 완전히 ‘나’라는 의식을 지워버린다면 어떨까?


사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마음의 고통은 거의 대부분이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이 맞는가, 미래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나에 대해 물었지만 답은 언제나 허공을 빙빙 돌았다. 여기에 적합한가 아닌가를 묻는 것은 어디에도 제대로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세상과 타인의 일을 나라는 틀을 들이대서 바라보니 온통 부조리하고 울퉁불퉁해 보였다. 그러니 모든 상황과 사람이 편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 모든 생각의 중심에 있는 ‘나’라는 키워드를 빼버리니, 고민의 8~90%가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나를 빼놓고 생각하면 세상의 일을 그대로 볼 수 있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될까를 걱정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참으로 많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도 받아들여지고,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사람의 행동도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라는 의식을 없앤다는 것은 나를 공허한 존재로, 투명인간으로 만들라는 말이 아니다. 헌신하다 보면 헌신짝 된다는 말은 정말인 것 같다. 그냥 다 괜찮다고 하면, 사람들은 괜찮지 않은 부분에 까지 침투해 들어온다. 그리고 당연히 무엇이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다. 상대는 내가 내보낸 신호를 중심으로 나를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은 나를 중심에 두고 한 행동이다. 그냥 괜찮다고 말하는 것,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아무거나 하라는 식의 태도는, 상대방이 알아서 하라는 말과 같다. 나는 다 양보했으니 당신이 모든 책임을 지라는 말과 같다. 당신 말을 잘 들었으니 나를 결코 떠나서는 안 된다는 강요와도 같다. 


나라는 의식을 지운다는 것은, 나를 특별대우 하지도 하대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나를 세상에 속한 동등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대하는 것이다. 특별하게 튀는 것도, 특별하게 동떨어진 것도, 특별하게 예외가 되는 것도 아니라, 참으로 많은 여러 사람들 속에 놓여있는 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당연히 나도 관계 속의 정당한 참여자다. 다른 사람도 역시 정당한 참여자이며, 충분히 관심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본다면 굳이 나라는 사람을 특별히 의식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는 나로 살아있고, 기쁨, 슬픔, 분노, 무료함과 같은 다채로운 감정을 몸소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으로 느끼는 쾌락과 고통도 바로 ‘내’가 겪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다 감당해야 한다. 24시간 이 몸뚱이와 함께 있어야 하고, 이 몸이 가 있는 곳에서 어쩔 수 없이 다양한 경험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쾌락과 고통, 이 두 가지를 잘 다룰 수 있다면 나와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이 두 가지를 잘 보기 위해서는 나라는 사람을 잘 이해하고, 보살필 줄 알아야 한다. 


조던 피터슨 교수가 쓴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을 보면, ‘나를 돌보아줘야 할 사람으로 대해 줘라’는 챕터가 있다. 여기에서 피터슨 교수는 ‘왜 사람들은 자신을 잘 돌보지 않고 방치를 해 둘까?’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니 추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게 되어서,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심한 진상, 폭군, 나쁜 친구가 되어준다.


나도 생각해 보니, 나를 정말로 잘 돌보지 않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다반사고, 다른 사람의 일이 있으면 나의 일은 후순위로 밀어 버렸다.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할 때면 한 그릇에 말아서 후루룩 먹거나, 레토르트나 시리얼을 먹어 버린다. 사람 만날 일 없으면 옷도 대충 입고 머리도 빗지… 감지도 않는다. 아픈 데가 있는데 병원도 안 가고 버틴다. 


정말 나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이러한 행동도 나를 중심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아프다면 약 챙겨주고 병원에 데려갔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밥을 먹인다. 그런 것이 나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나는 특별히 챙김을 덜 받아도 잘 살 수 있는 그런 강인하고, 특별한 외계 생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즐거운 것을 보고 편안 상황에서 안락함과 행복을 느낀다. 성취와 보상을 통해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한도가 넘는 많은 일을 할 때 스트레스가 쌓이고, 잠도 자기 않고 잘 먹지도 않으면 몸이 아프게 된다. 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도 적용된다. 이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렇다고 인정해야 한다. 나는 ‘엄마니까 특별히 희생할 수 있다’, ‘엄마는 강하다’, ‘나를 챙기는 것은 다른 사람을 챙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필요 없다. 그냥 똑같이 다른 사람을 대하듯 나를 대하면,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특별대우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특별한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내려놓을 때, 아이를 아이로, 남편을 남편으로, 시댁 식구를 시댁 식구로, 친구를 친구로 그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내가 겪는 고통은 정말로 더 많이 사라진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 평온함과 행복이 서서히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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