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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타치 Nov 26. 2023

1년 치 엄마의 쓸모

김장

처음으로 김장을 했다. 아니 도왔다는 게 정확하다. 부모님이 주시면 잘 먹기만 해 왔다. 김장철마다 남편은 나도 하지 않는 친정 엄마 걱정을 한다. 올해는 꼭 가서 돕자는 부탁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번주 토요일이래.” 

이지미 출처 pixabay

몇 해 전부터 부모님은 텃밭을 일구시고 계신다. 한 고랑 두 고랑 늘어나더니 규모가 꽤 커졌다. 김장을 위해 배추도 심고 고추도 기르고 이번에는 고춧가루까지.

우리 식구가 밭에 도착했을 땐 커다란 대야에 배추가 절여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쌓인 배추를 보니 신경 써서 펴고 있던 미간이 나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그런 딸을 뒤로하고 체험장에 온 듯 신이 난 손주들과 벌써 부산하다.

“아이고, 아이고 허리야.”

엄마는 소금에 절여진 배추를 들어 올릴 때마다 신음소리도 같이 건져 올린다.

“요즘에 김치 많이 안 먹어요. 내년부터는 엄마, 아빠 드실 것만 하세요.” 

알았다고 알았다고 연거푸 두 번씩이나 답하지만 내년에도 많이 하실 거다. 본인의 쓸모를 음식으로 드러내는 엄마니까.     

요리를 하는 곳에서 엄마는 여장부다. 김장이든 잔치든 팔을 걷어붙이고 진두지휘하며 푸짐하고 맛깔나게 뚝딱 만들어낸다. 인심도 후하다. 막 퍼준다. 원하든 원치 안 든. 엄마의 음식 솜씨는 아빠가 둘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며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음식이 최고라느니, 둘째 며느리를 잘 얻었다느니. 제사 때가 되면 엄마를 치켜세우는 말들이 넘친다. 큰 엄마가 제사를 거부하는 사건이 있은 후 제사 때가 되면 우리 집이 북적거렸다.

     

가방 끈이 짧은 엄마가 학자 집안에 시집오며 자격지심리 컸던 걸까. 리더십도 강하고 목소리도 크신데 유독 시댁 모임에서는 말수가 적고 순종적인 며느리가 되었다. ‘사’ 자 들어가는 시댁의 교육 방식을 오빠와 나에게 적용하셨다. 집안일은 홀로 도맡아 하시고 공부만 하라고. 금쪽같이 키운 자식이 결혼하면 배우자가 고생하는 것 같다. 내 남편과 새언니가 그 희생자인 듯. 억수로 운이 좋게도 내 남편은 부지런하고 요리를 꽤나 잘한다. 그러나 새언니는 부엌을 얼씬도 안 해본 친정 오빠를 만났다. 불만 가득한 새언니의 한탄을 잠재우는 건 엄마의 쓸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언니의 친정엄마는 음식을 못하신단다. 새언니네 냉장고는 엄마가 채워준다.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단출해진 식구지만 만드는 음식의 양은 줄지 않았다. 냉장고만 세대다. 우리 식구를 비롯해 오빠네 식구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가득하다.    

연세가 곧 여든이다.

이지미 출처 pixabay

“할머니, 그동안 김장하느라 힘드셨죠? 내년에도 같이해요.”

태하랑 기하가 말했다.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엄마, 그동안 힘들었죠. 매년 올께요.'


#김장#사춘기아들#제사#친정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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