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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타치 Feb 03. 2024

드디어 목소리를 들었다

우성이는 열 번째 수업만에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일관되게 고개를 젓거나 떨구던 학생이다.

수업 전에 아이들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궁금했다. 일찍 도착해서 교실을 둘러보는 이유다. 매 시간마다 우성이는 학원 숙제를 하고 있었다. 제 학년보다 훨씬 앞 선 수학문제집을 푸느라 내가 옆에 있는 지도 모른다. 문제를 푸느라 바쁠 뿐이다. 그림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이는 아이이기도 하다. 수업 시간 동안 한 두 권의 그림책을 읽어준다. 두 번째 그림책을 꺼내려고 잠시 처음 읽었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여지없이 손을 뻗어서 자기 앞으로 끌어다가 다시 넘겨보는 학생이기도 하다.

ⓒpixabay

나의 그림책 수업은 함께 읽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작가가 왜 이렇게 제목을 붙였는지, 작품 속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지 등. 질문을 하자마자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워서 입을 옴짝달싹 못하는 학생, 급한 마음에 손은 들긴 들었는데 까먹었다는 학생들 사이에서 우성이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주목받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써보라고 했다. A4 크기는 저학년 아이들에겐 압도할 만큼의 큰 용지라서 손바닥 크기의 작은 메모지를 준비한다. 그림책을 읽은 후 떠오르는 단어 혹은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도록 한다. 저학년은 글자를 잘 몰라서 질문을 하느라 생각을 집중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글을 쓰기가 힘들면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우성이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뭔가를 열심히 그린다. 자리가 없다며 종이를 더 달라고 했다. A4종이에 앞 뒤로 가득 그렸다.

"우성이 학생은 연필로 어떻게 이렇게 그렸어요? 꼭 붓으로 그린 것 같아요. 정말 잘 표현했어요."

본인이 그린 그림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동안 왜 표현을 안 했어요?"

"틀릴까 봐요. 학원에서는 틀리면 숙제가 많아지거든요."


객관식 문제에 익숙하고 답을 맞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많다. 정해진 답을 요구하지 않는 열린 질문을 하면 어리둥절해한다. 1,2,3,4 보기를 달라고 하거나 힌트를 주면 안 되냐고도 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답이니깐 자유롭게 얘기해 보라고 해도 쉽게 답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이 고학년뿐 아니라 저학년 학생들한테서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고학년들이야 즉흥적으로 말하기 전에 심사숙고하는 경향이 있다손 치더라도. 저학년들은 떠오른 대로 다양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최근에 많은 학생들이 학원에 다니며 객관식 문제에 익숙해진 것 같다. 지다 보니 보기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답하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한다.

ⓒpixabay

나와 함께하는 수업에서만이라도 틀리는 것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글이 익숙한 아이는 글로, 말이 편한 아이는 말로, 그림이 좋은 아이는 그림으로. 어떤 형태로든 자유롭게 표현하며 자신의 생각을 확장하고 단단하게 세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그림책수업은 정답도 없고 숙제도 없다.




                                                                                       

                                                                                       내용에 나오는 이름은 가명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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