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병원에서 3년을 일하는 동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나 많은 생각을 했다.
10개월가량의 임신 유지기간을 무사히 보낸 것, 선천적인 장애가 없는 것, 출산과정에서 아기와 엄마 모두 무사한 것, 태어난 후 50일, 100일을 지나 돌이 될 때까지 큰 병 없이 잘 커나간 것,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을 거쳐 지금까지 한결같이 크나큰 책임감으로 한 명의 아기를 책임지고 키워낸 부모가 있다는 것,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지기도 했다. 만약 나에게 아기가 찾아왔는데 원치 않은 상황에서 원치 않은 상대로부터 생겼다면? 임신 주수를 충분히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 수많은 위험을 겪게 된다면? 선천적인 장애가 있어 태어난 이후 끝없는 돌봄을 요구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까?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어쩜 저럴 수 있는지 화가 나는 순간도 많았다. 보호자가 있으나 연이 끊어져 병원 생활에 필요한 그 어떤 물품도 보내지 않는 사람들, 일 년에 몇 번 있는 외부진료 때 만나지만 아이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 갑작스러운 상태변화로 전원이 필요하나 충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전원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태어나자마자 유기되어 무연고자로 입원하는 신생아들..... 그들의 주소지를 보면 소득 수준이 절대 낮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고, 가장 마음이 찢어졌던 건 그들의 가정엔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다른 자녀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가 조금 가라앉은 뒤엔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졌다.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안 흔들릴 자신이 있는지에 대해서.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위선자 같은 스스로의 모습에 그저 실소만 터졌다. 어느 뉴스에선가 장애판정을 받은 자녀를 엄마가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게 내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 있는가. 아이들은 작을 땐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귀엽다. 수많은 가능성 앞에 반짝일 뿐이다. 하지만 장성한 이후에는? 장애가 있는 장성한 자녀를 돌보는 늙은 부모에 대한 모습은 이미 수많은 매체에서 다뤄져 왔다.
그럼에도 하나쯤은 장담하고 싶었다. 내가 어떤 엄마가 될지 나도 잘 모르지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럴만한 자질을 가졌는지에 대해 끝없는 의문만 들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아이의 안식처이자 웃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간호사가 되려는 그 최초의 마음을 다시금 깨달았을 때부터 간직한 생각이었다. 언제나 내 시선아래 존재하는 아주 작지만 강한 그 삶을 굽어보며 아이의 티 없는 웃음을 지키고 싶다. 그 무해한 웃음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침해당할 수 없으며 지켜져야 할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못한 삶이 아닌, 깊게 뿌리내리며 반짝이는 모습으로 정의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지켜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