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으로 나를 구하기 위하여 "열두달" / Editor. 초록
스스로 갖는 물욕만큼이나, 아니 혹은 더 욕심을 내는 마음이 있다. “선물욕”
나는 스스로 선물욕이 꽤 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명절이 되면 집안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것들을 가득 모아 번호가 적힌 종이를 넣어 뽑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찾아온 사촌 동생들이 뽑은 번호에 맞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명절은 내가 산타클로스가 될 몇 없는 기회였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가 가진 최고의 것들을 모아 스스로 자신하는 최고의 산타가 되었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시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스스로 산타를 자처한다. 예전에는 이런 내 모습이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모습 같아 조금 서글프고 어쩐지 창피하기도 했지만, 설사 그것이 일부분을 차지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가 준비한 것들을 좋아하는 마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정리했다.
나에게 선물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시작해 그 사람을 떠올리는 일, 그리고 그를 위해 알맞은 무언가를 고르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골라 구매하고 어울리는 포장을 하고 전달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으로 인식되는데, 그래서 “선물”을 하기 위해 공들인 모든 시간의 모습들을 좋아하고, 어떤 선물들보다 손편지를 받을 때 가장 마음이 부풀어오는 것을 느낀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글을 쓰고 적는 그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저 글이 쓰인 종이일 뿐인데 마음이 그토록 그득히 담겨서야, 무거워서 어디 작게 담으려 해도 담아지지 않는 그 묵직한 감동이 나는 너무 애틋하다.
손으로 사부작 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지만 손으로 하는 것에 그리 자신이 없는 내가 가장 만만하게 좋아하는 일이면서, 끄적거리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 중 가장 낭만적이라고 느끼는 그것. 편지. 잘하고 못하고의 어떤 기준이 있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편지는 오로지 한 사람, 한 상대만을 위해서 쓰는 글이 아니던가. 그러니 평가의 기준도 없고, 있다 해도 한 사람의 마음에만 달려있으니 부담 없이 한 사람을 위한 글로 그들의 안부를 묻고 나의 마음을 전한다.
나는 보통 그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꾹꾹 눌러 담은 수줍은 나의 언어를 전달하기 위해 다른 물성의 선물을 함께 준비한다. 내가 왜 이걸 너에게 선물하는지, 내가 왜 이런 글을 적게 되었는지, 내가 어떤 마음과 어떤 언어로 너를 사랑하는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당신들의 편지를 받아 읽을 때마다 내가 새로운 나를 느끼는 것처럼, 너도 모르게 지나치고 있는 너의 어떤 부분을 나의 언어로 설명해주기 위해. 나한테 네가 얼마나 빛나고 소중한 사람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열두달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선물”
선물은 하고 싶지만 흔한 것은 하고 싶지 않아.
조금 쓸모없지만 동시에 쓸모 있는 것을 선물하고 싶어.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 귀여웠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 너에게 어울렸으면 좋겠어.
등등의 기준으로 열심히 고르다 보면 리스트에 채워지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다 발견한 열두달의 비누.
흔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부담 없는,
조금 쓸모없는 듯하지만 아주 유용한.
무엇보다 귀여운.
그렇게 시작된 열두달의 경험.
이번에는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닌 나를 위한 시간으로.
흔하지 않고, 쓸모없지만 쓸모 있고, 무엇보다 귀여운 그것을 나를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해.
새하얀 종이에 원하는 비누의 모습을 그린 후 디자인 색에 따른 분말과 취향에 맞는 향을 고른다. 그렇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비율에 맞게 각각의 정도를 지킨 분말과 오일을 나눈 후에는 인내의 시간만 남게 된다. 모든 것을 한데 모아 5분가량 멈추지 않고 섞고 또 섞다 보면 무아지경 소울의 상태에 빠진다.
(영화 소울에서는 주인공 조가 재즈 몰입 단계에 빠지는 소울 존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섞다 보면 찾아오는 배고픔에 이것이 크림치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든다.)
그렇게 잘 섞인 비누 반죽에 디자인 비율에 맞는 분말을 섞어 색색의 반죽을 위한 반죽을 한다. (또 몰입의 단계가 시작되지만, 이것은 그리 길지 않다.) 반죽을 위한 반죽을 다 만든 뒤에는 틀과 그림에 맞춰 색을 차곡차곡 쌓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것과 헷갈리지 않도록 내 이름을 적으면 클래스는 끝이 난다.
하지만 클래스는 끝이 나도 비누 만들기는 끝이 아니다. 비누가 어느 정도 굳고 나면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먹은 뒤 거침없이 커팅도 해야 하고, 돌이킬 수 없다는 후회 없는 마음을 담아 도장을 찍고, 또 다른 인내의 시간인 굳히기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진짜 진짜 최종의 굳히기가 끝난 뒤에야 비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몫이 아닌 비누의 몫이 되는 시간이다. 마치 내가 어느 정도 너를 다 키웠으니 너의 삶을 잘 살아내어 조심히 돌아오렴! 하고 외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는 시간이다.
열두달에는 이미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 굳히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것을 만들었는지, 나처럼 소울 존에 빠지기는 했는지, 이것들은 어디로 향해갈지. 이들도 누군가에게 아니면 자신을 위해 어떤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려고 만든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공간에 가득 찬 궁금증을 뒤로하고 느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비누가 조각으로 남으면 끝까지 쓰지 않고 대충 새것을 꺼내는 내가 이 비누는 온 마음을 다해 마지막의 마지막 그 조각조각의 순간까지 소진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비누는 온전한 나의 것. 나를 위해 준비한 나를 위한 것. 나를 위한 산타이기를 자처하여 만든 오롯한 선물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내가 하는 행위들이 쓸모없고 돈만 들어가는, 그저 감정에 치우친 소비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좋아하는 마음들로 가득 채워 고작 나를 구하는 일이 중한 사람인 것을.
나는 그렇게 나를 위해 쓰인 그들의 언어로 삶을 채우고, 그렇게 받은 빛나는 언어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중한 사람인 것을 말이다.
*Place*
✔️ 열두달 비누공방 : 전북 익산시 고봉로 18길 79-3 1층 / insta@12dal_soap
*Editor Nyeong's comment.
- 요즘같이 골목골목에 새로운 것들이 생기는 시기에는 동네를 다닐 때마다 탐방 레이더를 켜고 다녀야 한다. 바짝 켜놓지 않으면 놓칠 수 있다. 그날도 골목에 새로 생긴 카페를 찾아가며 레이더를 바짝 키워 놓고 있었다. 삐-빅, 앞에 빈티지 꽃무늬 커튼의 전면 유리창의 공간이 보인다. 안 가볼 수가 없다. 창문에 바짝 기대어 안을 살펴본다. 공방 같다. 무엇을 하는 공방인지 레이저를 켜고 주시한다. ‘언젠가는 꼭 가봐야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코로 향기가 쑤욱 들어오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실험실 같은 도구들을 곁에 두고 오일이 각각 mm인지,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몇 도까지 온도를 낮추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마지막 비누에 기포가 생기지 않게 ‘탕-탕-’ 쳐내는 작업을 마지막으로 한 달간의 숙성과정만 남는다. 바짝 집중하고 나니 어느새 우리의 비누 만들기 실험이 끝났다.
숙성을 기다리는 시간도, 색색깔 다른 그림이 그려진 우리의 비누도, 그 공간의 향도 기다려진다.
*Editor 궁화's comment.
- 돌고 돌아 결국 닿는 인연. 이것을 필연이라 해야 할지 노력이라 해야 할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꽤 오래전, 아마 2-3년 전쯤 발견해 정작 나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만 했던 비누 공방이 바로 <열두달> 이었다. 그리고 공방 사장님과 SNS로만 서로의 존재를 자각하고 있던 게 어언 2-3년, 결과적으로 2021년이 되고 나서야 드디어 입성해 보았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난생처음 만들어본 비누에 괜히 올라가는 입꼬리와 뿌듯한 감정은 애써 감춰보려 했으나 아마 티가 났지 않았을까. 그만큼 나의 디자인, 나의 향 등 오롯이 나의 취향이 담긴 비누라는 것이 준 힐링은 꽤나 컸다.
그리고 건조를 기다려야 하는 한 달이라는 시간은, 과정을 다시금 곱씹어보는 또 다른 나만의 시간이 될 테니 그 또한 이 지친 일상에서 하나의 탈출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역시 ‘나’를 표현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