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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an Sep 03. 2022

Sun Down

아등바등 살지 말자

 : 스포가 있습니다.


주인공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 짜증이 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체념한 듯한

흡사 종교인이라도 된 듯 현실을 초월해 보이는 남자


그리고, 이토록 자신을 방기 해버린 남자에게 세상은 가혹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와 아카풀코 해변에서 중년의 로맨스를  불태우기도 한다.


표면적으로 그는 거대한 상속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호화로운 초특급 리조트를 버리고, 초라한 호텔에서 여행지에서 만난 여자와 연애를 하고, 태양을 즐긴다.


남자의 난관은  여조카에게 술병으로 머리를 맞고, 여동생의 총격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있다는 혐의를 받고, 멕시코 집단 감옥에 갇혀 수형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 또한 견딜 뿐이다. 이 불가해한 생을 견디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가 맞는 고난이 특별히 부당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 또한 타당하고 유추되는 시련일 뿐 남자는 고의적의 고 악랄한 어떤 악의와 공격으로부터 자유롭다. 조카들로부터는  동생의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있고, 경찰로부터는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돈을 뜯어내려고 법과 무관하게 꼼수 판결을 내리는 악마 판사, 엮인 피라미들 같은 공권력을 가장한 범죄자들이 벌이는 폭력 같은 ( 영화에서 이렇게 폭력을 사용하여 부를 획득한 이들에게는 그러한 부를 갖지 못한, 그러한 기회를 박탈당한 자들로부터 일종의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이런 자들, 가난한 멕시코 서민들에 비해 어떠한 비도덕적인 방법을 통해 과도한 부를 축적한 이들에게 무엇보다 적합한 결말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여동생 클레어의 죽음은 그녀의 개인적 악행보다는 불법의 수단으로  거대한 부를 걸머진 자들에게 닥쳐올 수 있는 죽음에 대한 하나의 방식이다. 영화에서 이것은 일종의 정의의 실현으로 보인다.) 거대한 부를 둘러싼 기만과 악의로부터도,  그리고 돈으로 비롯된 듯 한 느닷없는 살인으로부터도,


그의 부를 짐작하고 노리는 듯한 멕시코 운전수는 정작 그가 아닌,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실제적인 공격을 가한다.


무언가 놓아버려, 주변 인물로부터 공격받을 것 같은 그가  걱정이 되기도 하며,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고, 무언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러니까 인생은 그 어디쯤인가에 있다.


초특급 리조트의 풀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의의  삶과

연인과의 육체적 쾌락과.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폭력과  그리고 죽음


그리하여,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나기도 한다. 아등바등 살지 말자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에 불과하니


영화 말미, 남자의 이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모습이 이해가 가는 것도 , 그는 시한부 인생임을 알았기에?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짐작일 뿐.


혼자 죽기 싫어 어머니와 여동생을 보내고야 만 사이코패스? 미친놈이 많은 세상이라 이 주인공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멕시코 아카풀코 해변에서 벌어지는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인 영화


저렇게 풀장에서 무위의 시간을 보낸 기억이 없다.

한 번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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