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의 새해는 침묵으로 시작한다.
23년의 녜삐(Nyepi)는 3월 22일이었다. 매년 355일마다 새해를 기념하는 날. 이 날은 발리가 멈추는 침묵의 날(Silence Day)이다. 이 날에는 1. 불을 키는 것, 2. 일하는 것, 3. 집 밖을 나가는 것, 4.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 금지된다. 그래서 바깥으로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불을 끄고, 소리를 내지 않으며 집 안에 머문다고 한다.
전기도 인터넷도 모두 끊긴다는 소리를 듣고 발리 사람들에게 불편하지 않냐고 여러 번 물었는데, 대부분 녜삐는 ‘정화’의 날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마음의 고요를 되찾고, 신에게 세계와 우주의 정화를 빌며 새해를 맞이하는 발리 사람들. 평화의 근원은 침묵하고 감사하는 녜삐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날을 피해서 발리를 방문한다고 하는데, 나는 한 번쯤 겪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짧은 기간으로 오면 당연히 피해야겠지만, 나는 1달 동안 충분히 발리를 겪은 이후였기 때문에 녜삐를 통해 정리하고 발리를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깊이 감사했다.
직접 경험해 본 녜삐는 평화 그 자체였다. 오로지 자연의 소리만이 가득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굉장히 신비로웠고 저절로 마음에 고요가 찾아오는 것 같은 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구름이 흘러가는 속도를 바라보고, 나무에 앉는 새들의 지저귐들 듣고, 빛의 색이 달라지는 시간을 즐기는 것. 하루 전체가 명상처럼 느껴졌다.
혼자서 멈춤의 하루를 의식적으로 편성해서 지내볼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전체가 멈추는 것이 아니다 보니 여러 자극 지점들이 있을 수 있다. 반면 녜삐는 발리섬 전체가 멈추었다 보니 침묵과 멈춤, 자연이 주는 평화 자체를 감각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사람이 멈춘 세상은, 지구는 고요하고 그 자체로 향긋했다.
행여나 부지런함에 익숙한 한국인이 외로움을 느낄까 봐 2마리의 까만 고양이 형제가 갑자기 내 방으로 찾아와 기쁨을 선물하기도 했다. 식사로 챙겨 둔 삶은 계란을 알뜰히 나눠먹었다. 계란 노른자를 유독 좋아하던 두 친구 덕분에 뜻하지 않게 고단백 식사를 했다. 자연스러운 자연의 흐름을 이렇게도 느꼈다.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는 부지런히 노을 산책을 했다. 내가 머물렀던 곳이 오래된 리조 트였다 보니 큰 숲과 정원이 잘 조성되어 있었고, 리조트 내 산책로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서 녜삐가 크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출국 전 날이었기에 내가 느낄 수 있는 발리는 모조리 다 눈에 담고 싶었다. 특히 다양한 초록색이 우거진 발리의 정글은 놓칠 수 없었다.
녜삐가 주는 또 하나의 축복은 까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을 켤 수 없다 보니 지상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어둡게만 느껴졌던 밤하늘이 별로 환하게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간들이 만든 눈부신 조명들에 가려졌던 별들은 밤하늘을 가득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눈부시지 않게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찬란하면서도 우아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싶어 감탄과 웃음이 쏟아졌다.
정말 특별했던 발리에서의 마지막 밤. 모든 것이 멈춘 날. 덕분에 나도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는 익숙한 마음을 살짝 멈추고, 순간을 느끼고 즐긴다는 감각을 되살렸다. 화려함에 덮여서, 조급함에 미뤄져서 바라보지 못한 아름다운 순간들과 내 마음을 차근차근 만났던 날. 발리에 머물면서 가장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