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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지기 목욕탕 친구

우리는 일로서 깊은 우울을 덮고 산다.

by 위드리밍

3월을 시작할 때 즈음, 삼십 n년지기 친구가 해외살이에 큰 우울증을 느끼고 한국으로 돌아온단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초부터 오래된 친구의 우울증 증세가 심해졌다고. 솔직히 그 이야기를 들었던 우리는 모두 놀랐다. 전혀 그럴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게다가 조직 내에서도 늘 인기 많고 사랑받는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에 손에 꼽는 파워 E 친구 중 한 명.

거의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우리라 시차가 전혀 달라 매 밤과 새벽마다 줌으로 만나곤 했다. 그리고 결국 다시 한국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친구가 돌아오던 날, 우리 친구들은 각자 바쁜 일정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친구를 만나러 갔다.

어떻게 하면 친구가 회복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우리가 함께 했던 당시 옛날 동네의 목욕탕을 가기로 했다. 우리는 늘 목욕탕 친구였으니까.


학교 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조금 버겁다고 느낄 때면

단톡방에 늘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목욕탕 가자."

사진 출처 : 장수탕 선녀님, 백희나


그렇게 우리는 현실 삶에 치이고 찌들었던 이야기들을 시시콜콜하고 왁자지껄하게 풀어내며 목욕을 하며 물로 씻어냈던 듯하다. 그리고 맛있는 떡볶이를 먹으며 쿨하게 헤어졌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친구를 다시 만났고 그 후에도 기회가 닿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었다.

결국 친구는 다시 '일'을 하러 한국에 돌아왔다.

내가 인생 첫 번째 육아를 하며 느꼈던 지독한 번 아웃, 출산과 육아 우울증 그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며

뒤늦게 그 기저에는 '일'에 대한 결핍이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독한 '일 중독'을 겪어왔던 사람이라서 나의 자존감, 존재의 이유를 '일'로서 채웠던 과거가 많았다. 그렇게 나는 내게는 해로웠던 나쁜 습관이 쌓였다.

늘 일에서 큰 성취가 있었지만 마음은 공허했다.

그 성취 안에서는 늘 '나 자신'이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과거의 나들을 돌아보며,

늘 나는 참 '자기중심적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분명 함께하는 팀, 늘 함께 해주던 동료, 가족들이 있었음에도

'스스로 혼자서만 힘들다.'라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당시 힘들다고 손 한 번만 내밀었어도 그 누구라도 나의 손을 잡아줬을 텐데,

뭐든지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멋진 히어로가 되고 싶었었는지 혼자 뚝딱뚝딱 멋진 해결책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지독히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친구 덕에 오래도록 잊혔던 나의 '우울'이라는 키워드가 내 안에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이 타이밍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감정은 쉽게 전염된다.

특히 '우울'한 마음은 아무리 스스로 막으려 애써도 더 쉽게 주변으로 흘러간다.

스스로 '우울'한 마음이 든다면, '우울'이라는 단어를 '행복하지 않아'라는 단어로 바꿔보길 바란다.


그 즉시 과거의 '우울'함이 이젠 '행복'함이라는 단어로 연상된다.


우리의 무의식, 잠재의식은 부정어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행복하지 않다. 즐겁지 않다. '않다'라는 부정어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행복', '즐거움'이라는 키워드에 마음이 꽂힌다.

내면에서 자연스레 행복과 즐거움을 떠올리게 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어떻게 하면 즐거울까 가 자연스레 마음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쓰는 언어가 곧 나다.

오늘 나의 행복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올해 초 친구와 줌에서 만났을 때,

"네 '일'이 없어서 그래."라는 말을 친구에게 했다.

그리고 내가 겪었던 지독히도 긴 우울의 터널을 이야기했었다.


친구도 속한 조직 안에서 서로 관계하고 교류하며 큰 사랑을 받으면서 살았던 친구라,

그 사랑 가득했던 조직이 한순간에 사라진 후 공허함을 많이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일을 찾아왔다고...


나의 '일'에 대한 결핍을 인지한 지 약 9년이 흘렀다.

그 이전 나는 지독한 일 중독이었고,

일에 대한 결핍을 인지한 후에도

지독히도 일과 일상의 워라밸 밸런스를 지키려 고군분투하기도,

때론 일 중독 엄마로 일하며 엄마로서의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그 긴 터널을 지나 이제 다시는 '일'하는 엄마를 꿈꾸고 있다.


9년의 긴 시간 동안 운이 좋게도

진짜 '행복'이 무언지를 알아왔고

'기록'이라는 훌륭한 도구가 생겼으며

그 덕분에 진짜 나의 내면, 그 마음을 알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나 자신의 건강한 자아에 의지할 수 있을 거야. 외로운 순간에는 타고난 나 자신의 자유로운 감정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거야. - 제인 에어"

오늘자, 커피를 내리며 미아 취향님의 커피 추천 책갈피에서 발견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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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로서 깊은 우울을 덮고 산다."


이 글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우울'은 단순히 '우울한 감정'이 아니다.

너무 멀쩡히 도 잘 지내다가 문득 말이 안 되게

깊은 '우울'의 감정이 내게 왔다는 건,

내면의 나, 그리고 신이 주신 기회다.


진짜 나, 내 안에서 늘 진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내면의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의 내면이 이야기하고 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지금 나를 둘러싼 현재의 나의 껍데기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내 안의 강렬한 외침이었다.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오늘자 나에게도 하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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