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간단히 웨딩 촬영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나는 초대할 가족도 친구도 없어 결혼식은 부담스러웠 고 남편도 재혼을 떠들썩하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집은 남편이 전처와 마련한 신혼집에서 그냥 시작했다.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집을 정리하고 새로 이사하려 했으나 해야 할 일들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그냥 괜찮았다.
어차피 나도 돈도 없고 내세울 거 하나도 없으면서 화려한 결혼식은 꿈도안 꿨다.
그리고 전처와의 신혼집이라 마음이 조금은 불편했으나 그 불편한 마음보다는 설레는 기쁨이 더 많았기에 불편보다는 기대가 더 많았다.
예전부터 내가 일하던 미용실들은 전부 다 아파트단지를 끼고 있는 장소였고 나는 늘 그런 아파트를 보면서 누가 살고 있을까 저런 집에서 사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평생 살 아볼 수 있을까 하고 그저 꿈만 꿀 수 있는 집이었다.
당장에 몇 천만 원짜리 전세 빌라에만 살아도 내 인생 은 로또였기에 아파트는 그저 평생에 살아볼 수 있을까 싶은 집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집이 내 꿈을 이뤄주는 로또보다 더한 아파트였다!
세상에나!!
24평에 방이 세 개고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엄청나게 크고 따뜻한 그 집은 그전에 누구와의 미래를 꿈꾸던 집이었는지와 상관없이 나를 더없이 설레게 했다.
나는 남편과 결혼해서 지금은 몇 번의 이사를 했고 집 은 점점 넓혀 신도시 아파트 30평대 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잠을 자고 일어날 때 화장실을 쓰고 주방을 사용할 때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너무 신기할 정도이니 그때엔 내 마음이 더 더 주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또 다른 이유는 이랬다.
나는 어릴 때 초경을 시작하고 쭉 생리가 불규칙했다. 지난번 두 번의 중절 수술을 했지만 그래도 아이를 갖기 힘들 수도 있다는 말이 나를 늘 불안하게 했다. 만약에 내가 아이를 낳아줄 수 없어도 우리 남편은 이미 아들 이 있었기에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내가 낳지 않은 5살짜리 남자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초보 엄마에게 너무나 힘들었다.
이미 일 년 동안 꾸준히 함께 만나고 시간을 충분히 보 냈다고 생각했지만 예쁜 이모에서 (아들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쁜 이모라고 불렀다.) 엄마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시어머니의 갖은 참견과 잔소리 아이 앞에서 내 권위를 무너트리는 행동들과 핀잔들 남편의 무조건적인 아이 편을 드는 행동들은 나를 더없이 멘붕에 빠지게 했다.
그래도 나는 남편을 사랑했기에 막상 결혼을 하니 우리를 닮은 내 아이가 갖고 싶었고 남편과 나 사이에 아이 가 있어야 시어머니의 저 시집살이도 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는 더 열심히 임신을 시도하려고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찾아다닌 일 년 동안 임신을 실패하고 좌절한 나는 다시 더 힘을 내 난임 전문 센터를 찾아갔다.
여러 가지 검사를 했고 내게 들려온 검사 결과에 더 좌 절했다. 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궁벽이 전체 단단해지고 두꺼워지는 자궁 선근증이라는 질환이 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나와 남편에게 임신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이가 안전하게 자궁에 착상을 해도 유지도 힘들고 끝까지 출산할 확률도 낮다고 무서운 이야기 (산모 중
에 어떤 분은 임신 7개월 자궁파열이 됐다는 이야기)를하셨다. 그러니 딱 세 번만 시도하고 안되면 포기하고 자궁적출 시술을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자궁선근증은 종양처럼 단독으로 시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궁전체가 혹이 되어 가는 거라 자궁 전체를 제 거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또 다른 합병증이 많아 적출을 권유받았다. 다행히 지금은 아이를 건강히 출산하고 몇 년 전 적출 수술을 했다.
남편 앞에서는 자신 있게 3번만 시도하고 안되면 포기하자 했지만 돌아와 혼자 있는 시간에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뭐 이리 평범한 게 하나도 없을까?
정말 너무나 속상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시도를 했고 첫 번째 시술을 했으나 부작용이 와서 일 년을 쉬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술 후 나는 임신에 성공했고 10개월 무사히 품고 나와 남편의 아들을 낳았다.
아이를 임신해 있는 동안에도 그냥 쉽게 넘어갈 리 없는 내 팔자는 임신 소양증이라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10달 내내 가려운 고통 속에 울며 불며 잠도 못 자며 버티고 버텨 아들을 만났다.
감격과 기쁨 속에 둘째를 안고 있는 병원에 큰아들이 찾아왔다. 나를 찾아온 큰아들을 보니 눈물부터 났다.
너도 이렇게 힘들게 세상에 나온 귀한 아이였구나.
너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가 미안하구나.
앞으로 엄마가 더 잘할게.
그렇게 우리는 완전한 가족이 되기를 꿈꾸며 둘째 아들을 맞이했고 둘째가 태어남으로 또 다른 우리의 인생이 펼쳐졌다.
그렇게 나에게도 봄날은 왔다.
둘째를 낳고 초반에는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고생해서 아이를 낳았나 하는 생각으로 후회가 될 만큼 독박육아가 시작 됐다.
둘째는 12월 1일에 태어났고 석 달 뒤 3월 첫째는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우리는 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그저 남편과 둘이 모든 것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왜 그랬는지 남편이 일을 하니 육 아는 전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리원에서부터 유난히 잠을 자지 않아 다른 아기들과 분리되어 혼자 독방 생활하던 둘째는 집에 와서도 나에게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밤잠을 새벽 5시쯤 자서 두 시간 자고 또 칭얼대다 안 겨서 쪼끔씩 낮잠을 자고 모유수유가 안 돼서 분유를 먹였는데 이유식 할 때까지 분유를 먹기만 하면 분수토를 해서 하루에 빨래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 와중에 첫째 입학준비 해야지 아침 7시에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밥 차려야지 낮에는 집안 살림 해야지 둘째가 태어나면 모든 게 내가 그린 그림 데로 척척 뭔가 해 줄 알았지만 내 앞에는 첩첩산중이란 말이 먼저 와닿았다.
그렇게 조리원 2주 생활도 애가 운다 애가 안 잔다 울 어서 다른 애들까지 깬다 갖가지 전화 콜로 조리원은 천국이란 말이 무색하게 달달 시달리다 집으로 왔고 더 큰 전쟁의 연속이었다.
나는 또 남편에게 아침에 출근해야 하니 편히 자라고 각방을 쓰자 했다. 그런데 이 눈치코치 없는 무심한 남자는 나한테 새벽밥을 얻어먹고 퇴근해서 내게 잠깐이라도 쉬라는 말도 없이 시간 되면 지 방에 들어가 쿨쿨 잘도 자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사랑한다며 너와 나를 닮은 아 이를 낳자며 그 개고생을 했나 싶은 게 밤이면 밤마다 현타가 왔다. 그래도 그 삶마저 내가 살아온 날보다
평범함에 감사했고 현타보다는 행복이 더 많았다.
나는 결혼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도 낳고 출산의 고통과 신생아 육아 단 한 번에 아들 둘이 생겼고 내
과거를 잊고 살 수 있는 동네에서 내가 살아온 날들을 모르는 애기 엄마들을 친구 삼아 꿈에 그리던 아늑하고 따뜻한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평범하고 평범한 삶을 살게 되면서 길고 긴 추운 겨울을 지나 인생의 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