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1982년 8월,
무더운 여름 충청도 공주에서 나를 낳았다.
나는 엄마의 하나뿐인 피붙이이다.
엄마에게 나는 딸이고, 친구이며, 때론 남편이자
엄마가 되어주기도 하는 존재.
세상 전부를 잃어도 지켜야 할 마지막 재산이 바로 나였다.
사람마다 소설 한 권은 쓸 만큼의 사연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엄마의 이야기는 책 몇 권으로도 부족할 만큼 기구하다.
엄마의 이름은 김 00.
2025년, 올해 일흔둘. 다섯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예쁨은커녕 막내라 더 고단하게 자랐다.
“가난하다, 가난하다” 했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가난이 엄마의 삶이었다.
국민학교 3학년 중퇴.
한글을 겨우 읽고 쓰는 것이 엄마의 최종 학력이 되었다.
엄마의 인생은 유난히 죽음이 많았다.
다섯 남매 중 특히 각별했던 바로 위 언니는
도시로 돈 벌러 갔다가 우울증을 앓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는 약을 먹고 엄마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 엄마의 부모님 두 분도 엄마가 스무 살 되던 해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배움도 짧고, 사랑도 못 받고,
연이은 죽음으로 불안과 외로움만 커진 엄마는 서둘러 결혼을 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아들 셋을 낳았지만, 셋 중 한 명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두 아이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 고통과 죄책감은 결국 첫 번째 남편과의 이혼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엄마는 나를 낳아준 아빠를 만났다.
엄마는 다시 재혼했고, 병원 갈 형편도 못 되어 산파 할머니 도움으로 나를 낳았다.
산파 할머니가 딸이라고 했을 때, 엄마는 직감했다고 한다.
“이번 아이는 살겠구나.”
아들 셋을 떠나보낸 후 처음으로 얻은 딸이라,
그 말 한마디에 엄마는 살 희망을 붙잡았다.
나는 다행히 건강하게 자랐고,
곧 연년생 남동생이 태어났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뒤, 아빠는 트럭 사고로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사랑하는 언니, 부모, 아이들, 그리고 남편까지…
짧은 세월 안에 수차례의 죽음을 겪었다.
그 충격과 슬픔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아기를 업고 또 한 아이를 안은 엄마는 당장 먹고살아야 했지만 아이 둘을 품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굶어 죽을 수는 없다는 주변의 권유에 결국 눈물로 남동생을 입양 보냈다.
아들을 보내던 그날, 엄마는 가슴이 찢겨 나갔을 것이다.
내 기억은 여섯 살, 일곱 살 무렵부터다.
그때부터 나는 그냥 엄마랑 둘이었다.
아빠라는 존재는 아예 개념조차 없었다.
일곱 살 무렵, 엄마는 나를 데리고 또 한 번 재혼했다.
그러나 그 새아빠는 술에 절어 살았고, 폭력적이며
내게 아빠라는 존재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 새아빠도 내가 열아홉 되던 해 알코올로 망가져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그렇게 부모에게 대물림된 가난과 죽음을 껴안고
고단한 생을 살아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
그 말이 너무 무서웠다.
나는 날마다 다짐했다.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지독한 엄마의 팔자가 내게까지 대물림될까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