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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가 간절히 배우고 싶던 내 마음의 좌절

by 은나무


나는 여덟 살 무렵부터 새아빠의 강요 아닌 강요로

여동생과 함께 교회 앞에 서 있었다.



새아빠랑 같이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우리 둘만 덩그러니

등 떠밀려 들어간 거였다.
그때 아빠 마음속엔 정말 예수님이 살아 계셨던 걸까.
본인의 삶은 그렇지만 우리에게 남겨주고 싶은 신앙이 있었던 걸까?



나는 평생을 살면서 그날의 장면을 잊지 못한다.
무섭지만 단호했던 그 표정 “들어가! 오늘 처음 왔다고 해!”
그 순간은 나중에 새아빠가 고마웠던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려 했던 그 마음만큼은 선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동생과 나는 마을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자리한 작은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니는 시골 교회였다.
예배는 늘 가족 예배처럼 다 함께 드렸고
예배 외에도 가족이 함께하는 행사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덩그러니 잘 섞이지 못했다.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며,
가정환경에 기가 죽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만큼 용기가 없었다.
어른들의 손길이 다가와도 쭈뼛쭈뼛 피하곤 했다.



그 안에서 느낀 감정은 하나였다.
‘다른 집은 저렇게 화목하고 따뜻한데 나는 왜 여기에서도 이렇게 이방인처럼 서 있을까.’ 나도 엄마가 있는데
왜 우리는 저들처럼 웃지 못할까 그 생각이 늘 서글펐다.




그 시절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교회의 집사님 부부가 마을 번화가 한복판에
보습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슈퍼, 세탁소, 오락실, 짜장면집, 다방, 버스정류장…
모든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곳
그야말로 마을의 중심이었다.



엄마는 내게 전과책 한 권도 사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보습 학원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데 교회 예배시간에 그 집 딸이 아직 국민학교 입학도 하지 않았는데 예배 반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 반주하는 아이의 모습은 감탄이 아니라

꿈이 되었다.
나는 엄마를 졸랐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처음엔 엄마가 조용히 “안 된다”라고 말했다.
매일같이 졸라대는 내게 이내 거친 욕과 함께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피아노 학원이냐”
“피아노는 쓸데없는 거다”라며 타박했다.
그때 엄마가 미웠다.



도대체 엄마는 내게 해주는 게 뭐가 있나 싶었다.
자전거가 타고 싶다고 했더니 파지 줍다 주어온 녹슨 고물자전거에 알록달록 테이프를 붙여 나에게 타라고 줬다.



그마저 자전거가 생긴 기쁨에 누가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 열심히 넘어지고 자빠지고 무릎이며 여기저기 다친 흔적들이 흉터가 되어 훈장처럼 남아있다.
엄마나 아빠 누구도 내 뒤를 잡아주지 않았다.
혼자 넘어지고 다쳐가며 두 발 자전거를 배웠다.



그때 나는 남들에겐 당연한 것들이 왜 우리 집엔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과책도, 인형도, 치킨 한 마리조차 특별했다.
가난은 당연했고 엄마는 매번 ‘안 된다’ 고만 말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엄마는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형편이었고
그 마음을 감추려 매번 차갑게 말했겠지.
어린 나는 엄마 마음을 조금은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다.
그냥 엄마는 능력도 없으면서 왜 나를 낳았나 싶은 미움의 화살이 엄마를 향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무언가를 꼭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일은 이루고야 마는 성격이. 때론 무모한 선택을 하는 이유도
그때의 결핍이 만들어준 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때 나는 엄마에게 갖은소리를 들어가며 졸랐다.
결국 지친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교회 집사님이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으로 갔다. 깔끔하고 단정한 원장님 앞에서
초라하고 부스스한 엄마의 모습이 괜스레 부끄러웠다.



그래도 같은 교회 사람이었기에
우리 형편을 아는 원장님은 원비를 반으로 줄여주셨다.
피아노를 모르는 엄마는
“몇 달만 배우면 돼요?” 하고 물었다.
원장님은 “몇 달이 아니라, 쭉 배우는 게 좋아요”라고 말했다.



학원 등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엄마 손을 꼭 잡았다.
그날만큼은 세상 어떤 엄마들보다 최고로 느껴졌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따뜻한 내 편으로.



그렇게 집에서 학원까지 논길을 걸어 왕복 40분을 오가며 다녔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엄마가 말했다.


“은정아, 추운데 맨날 걸어서 다니기 너무 힘들지 않아?”

“안 힘들어요. 원장님이 잘한다고 칭찬도 하셨어요.”


“그래도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래. 매일 추운데 학교 끝나고 오가면 위험하잖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은정아, 지금은 추우니까 잠깐 쉬자. 봄이 되면 3월이 되어 따뜻해지잖아. 그때 다시 다니면 되지? 그럴까?”
그날 나는 더 이상 조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그리고 봄이 와도 피아노 학원은 다시 가지 못했다.
엄마는 돈이 없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내 안에 길게 남았다.



피아노는 내 평생의 한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어 돈을 벌고 잠깐 피아노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꼬맹이들이 “원장님, 저 아줌마는 왜 어른인데 피아노를 배워요?” 묻던 그 목소리조차 귀엽고 행복했다.
그때 나는 어린 날의 꿈을 잠시나마 다시 꿨다.



그러나 오래 다니지 못했고 시간이 흘러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영재를 피아노 학원에 등록시켰다.
아들이 곧잘 한다는 말에 내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초3학년이 되자 아들은 다니기 싫다고 했다.

그래도 학원에서 만든 무대 위 아이의 피아노 반주를 보는 공연은 내 꿈이 이뤄진 듯해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남겨준 아이가 고마웠고 나는 아이의 뜻을 받아들이며 내 꿈을 접었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엄마가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라 했을 때
내가 조금 더 모르는 척 생떼를 부려볼 걸 그랬다고.



엄마의 마음을 왜 그리도 빨리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을까.

그때의 어린 나는 왜 그렇게 속이 일찍 커버렸을까....



그때의 엄마 마음도 나의 어린 마음도... 가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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