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힘들 때마다 의지할 곳을 찾아
무당집을 한참 찾아다닐 때 무당들의 입에서
저마다 엄마는 나처럼 무당 팔자라고 했다.
아니, 엄마야말로 타고난 무당팔자인데
엄마가 그냥 버티고 살아서 내가 이어받았다고 했다.
근데 엄마의 삶을 보면, 무당팔자라는 말이 공감이 간다.
엄마 주위엔 늘 죽음이 많았다.
어린 나이에 친언니의 죽음을 보아야 했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
엄마가 만난 두 명의 남편들의 죽음.
남자친구도 별 볼 일 없는 사람뿐이었고
자식복 부모복 남편복 없는
한평생 고되게 일해도 편히 누울 방 한 칸 없는 삶….
그런 엄마를 볼 때면
참 박복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새아빠가 어릴 때 등 떠밀어 처음 교회에 보냈을 때
나는 엄마에게 여러 번 말했다.
“우리만 애들끼리 가서 창피한데 엄마도 같이 가주면 안 돼?”라고 물어도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20대 때 미용실에서 만난 권사님의 도움으로
잠깐 동안 교회에 다닐 때에도
엄마에게 교회 이야기를 했을 때 욕만 먹었다.
그러다 내가 30대.
둘째를 낳고 처음 믿음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감사했던 것은 내 삶의 고생이 내 탓도 엄마의 탓도 아니었다는 것과 내가 망가지고 별 볼 일 없는 인생이 아니라 나 역시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있다는 평안함과 안정감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평생을 불안과 고통으로 살았을 엄마가
사람과 술이 아닌 ‘참된 사랑’을 알게 되기를 그 속에서 엄마의 마음이 회복되어 평안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 모녀의 삶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은 아니지만
우리가 겪고 살아내야 했던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나 엄마는 역시 나의 권유를 무시했다.
때론 답답하고, 때론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잠잠히 기다렸다.
어느 날, 엄마가 전화통화 하면서 말했다.
“은정아, 나 오늘 일하는 아파트에서 어디 교회에서 나왔다며 10킬로짜리 쌀을 줬어. 대박이지 않니?”
“우와 그래? 잘됐네.”
며칠 뒤에도 전화로 엄마가 말했다.
“오늘도 그 교회 사람들이 와서 수건을 주고 갔어.”
“그래? 왜?"
" 뭐 힘들게 사는 사람들 찾아가 도와주는가 봐. 자꾸 뭐 받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이번 주에 한번 가본다고 했어.”
“우와 그래? 근데 요새는 교회도 이단이 많아서 조심해야 하는데 가보고 교회 이름이랑 알려줘.”
“아니 뭐 자꾸 받아서 미안해서 한번 가보려고.
다닐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엄마는 엄마가 지키는 자신만의 도리가 있었다.
받으면 꼭 본인도 줘야 하는….
엄마는 정말로 그날 일요일 교회에 다녀왔다.
같이 일하며 매일 술 마시는 친구랑 함께였다.
새로 왔다며 작은 가방이랑 꽃이랑 선물과 함께
몇몇 분이 환대해 주셔서 그날 예배도 드리고 점심식사도 교회에서 하고 왔다며 교회가 엄청 크다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 찾아서 도와주나 보다 내게 자랑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번엔 가방도 받고, 꽃도 받아서
다음 주에 한 번 더 나가려고 한다고 했다.
같이 간 친구는 이제 안 간다고 해서 혼자만 가겠다고 했다.
엄마에게 들은 교회에 대해서 찾아보니 의심이 갈만한 곳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라고 했다. 오히려 기뻤다.
엄마는 그날 내게 교회 다녀온 이야기를 또 늘어놓았다.
그 어떤 신세한탄 전화보다 밝고 신이 난 목소리라
나도 더없이 반가웠다.
교회에 들어가 예배당에 앉았는데 찬양팀이 앞에서 찬양하고 있었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찬양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간의 외로움, 슬픔, 아픔, 모든 것이 떠올랐다고 했다.
우는 엄마를 누군가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줬고
그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꽉 막혔던 가슴이 홀가분 해졌다고 했다.
안내자를 따라 교회에 새 신자 등록도
얼떨결에 하고 왔다며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이 당분간 교회에 다녀야겠다고 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기도할 땐 꿈쩍도 않던 엄마가
갑자기 교회를 나가본다고 하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조금씩 변해갔다.
목소리부터 일단 변했다.
한 번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교회 가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잠깐 손수건을 꺼내 사용하고
주머니에 다시 넣고 교회에 갔는데
주머니를 보니 손수건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횡단보도에서 떨어뜨렸나 싶어
예배를 마치고 그 길로 돌아가 봤더니
횡단보도 한가운데 손수건이
더러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며
“하나님이 엄마를 생각해서
차가 밟고 지나가지 않게 지켜주신 거야.”
그렇게, 어린아이 같이 내게 자랑하듯 말했다.
맨날 성질만 나있고, 불안과 불평만 가득 이야기하던
엄마 입에서 웃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럼과 동시에 매일 술을 마시며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자꾸 마찰이 일어나고 점점 엄마에게 관계로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신앙을 갖고 단단해지는 과정이 기대되면서
이런 어려움에 넘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엄마는 현재 그 교회에
10년 가까이 출석 중이다.
처음엔 예배 시간이 너무 어렵고 재미없다고 하다가
점점 교회 가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평생을 먹던 술이 어느 날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먹고 싶어도 못 먹게 되어 술이 저절로 끊어지는 신기한 일도 있었다.
엄마 곁에 있던 술친구, 험담하고 싸우던 친구들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내게 더 이상 술에 취해 전화하지 않았고 엄마의 통장에도 그제야 조금씩 엄마가 흘린 땀의 대가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엄마를 4층에 있는 답답한 원룸에서 벗어나게 도와드리고 싶었다. 마침 엄마가 65세 때, 공공임대주택 정보를 찾아보다가 엄마가 몇 년 전 청약통장을 무심히 들어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원주에서 거주하는 65세 이상 대상자에게는 보증금 1000만 원 지원을 해준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나는 당장 원주로 내려가 엄마이름으로 신청을 했고
새로 지은 깨끗한 아파트에 시에서 지원을 받아 우리는
적은 돈으로 입주를 하게 되었다.
그때 엄마는 작은 임대 아파트에 들어서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평생 이렇게 깨끗한 아파트에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나도 눈물이 났다.
엄마를 더 마음으로 안아주지 못했던 게 미안했다.
엄마는 새집에서, 일도 열심히, 교회도 열심히 다니며
새롭게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