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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부랑자로 살아야지

[전민교 작가]

by 은나무


19살에 건너와 31살이 된 지금까지 미국 생활에서

내게 가장 힘이 되어준 건 여행이었다.
돈이 정말 없던 시절에도 라면만 먹으며 여행비를 모아 무조건 떠났다.



그중 단연코 가장 좋았던 건, 서부의 끝인 LA에서 동부의 끝 플로리다까지의 자동차 여행이다.
거리로 환산하면 총 2,527 miles(4067 km)였다.



때는 2021년 겨울.
대학원 재학 중이던 겨울.

방학이 찾아왔고, 원래는 치킨집과 카페 알바까지 두 탕 뛰며 생활비를 바짝 모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 몸도 마음도 모든 게 지쳐 있었다.



코로나 시기였고, 마스크가 필수였다.

청각 장애가 있어 입모양에 의지를 많이 하는 나에게

마스크 착용은 곧 소통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여기에 적어주시겠어요? 죄송해요."
아르바이트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학교에서도 마스크라는 장벽으로 사람들과 친해지기엔

자꾸 위축돼서 혼자 다녔다
그래서 결심했다.

어차피 혼자인 거, 더 열정적으로 혼자 여행해 보자.
두 번은 없을 미국 종단 자동차 여행이 그렇게 시작됐다.



세도나, 아리조나(Sedona, Arizona)


8시간을 꼬박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Bell Rock 석양에 붉게 물든 바위 덩어리는 생각보다도 아름다웠다.

장시간 운전하며 쌓인 피로는 그 붉은 돌을 만나자 마자 사라졌다.
이곳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여행의 첫날부터 가슴이 이리 뛰다니.


화이트샌즈, 뉴멕시코(White Sands, New Mexico)


눈처럼 하얀 이곳은 사실 석고 가루로 이루어진 사막이었다.
2억 7천5백만 년 전까지만 해도 바다였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혼자 왔겠다, 아는 사람도 없겠다, 아주 넓겠다...

나는 차량용 햇빛 가리개를 챙겨 언덕으로 뛰었다.



남의 눈치 볼 필요도 없이 깍깍 거리며 썰매를 타고,

끝없이 펼쳐지는 가루 언덕을 뛰어다녔다.

그 순간 나는 그저 나였다.
대학원생도 아니고, 청각 장애인도 아니고. 그냥 나라는 사람이었다.

저게 다 모래가 아니고 석고 가루이다


엘파소, 텍사스(티I Paso, Texas)


멕시코 영토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여기라고?
이곳은 무엇보다 기름값이 저렴해서 좋았다.
전망대에 위에 올라가 저 멀리 보이는 멕시코의 도시를 구경했다.



여기 사는 새들은 매일 미국-멕시코 왔다 갔다 하겠구나. 텍사스가 얼마나 큰지 3시간을 달려도 거대한 황무지만 나왔다. 연쇄살인범이 나타나도 시체를 못 찾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했다. 로드킬도 어찌나 많은지. 사슴, 너구리, 아르마딜로, 스컹크..
마음이 아파 당분간 고기는 못 먹을 것 같다.

저 멀리 어딘가가 멕시코다


휴스턴, 텍사스(Houston, Texas)


고2 때 미국 대학 입시준비 캠프에서 내가 속했던 반

이름이 '휴스턴'이었다. 그때만 해도 올 일 있을까 싶었던

휴스턴에 오다니.



3일 내내 딸기잼+누텔라 식빵만 먹었던지라 이날은 맛집에 가서 패티가 두툼한 햄버거를 먹었다.

살면서 먹은 햄버거 중 최고였다.

이거 먹으러 다시 텍사스에 오고 싶을 정도로.

아, 분명 어젠 당분간 고기 안 먹을 거라 했는데?

인간은 간사하다.

보기엔 평범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햄버거


뉴올리언즈, 루이지애나(New Orleans, Louisiana)


혼자 하는 여행은 장점이 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

뉴올리언즈는 원래 계획에 없었다.

재즈의 본고장이기에 가족과 오고 싶어 아껴두려 했다.



근데 지나가서 보는데, 세상에 여기 왜 이렇게 힙해?

결국 여기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거리마다 재즈가 흐르는 이곳.

언젠가 엄마 아빠 언니랑 또 오리라 다짐했다.

스텐바이미 노래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이곳


탬파, 플로리다(Tampa, Florida)


드디어 목적지 플로리다에 도착!

서부에서 동부까지, 다치지 않고 잘 왔다.

이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누군가는 가족과, 누군가는 연인과 보내겠지만

나는 나와 함께 있었다.



계속 저렴한 숙소에만 있다가 이날은 호텔을 잡았다.

호텔 창문 너머 바다는 매흑적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공허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사색하러 떠났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걸 보는데 왜 씁쓸했을까


콜럼버스, 조지아 & 피닉스시티, 알라바마(Columbus, Georgia & Phenix City, Alabama)


이제 다시 돌아가는 길.

따뜻한 플로리다를 조금 더 즐기다가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다. 결국 과속하다 경찰에게 잡혔다.

'배가 아파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밟았어요 한번만 봐주세요.'..라고 해볼까 고민했지만, 순순히 벌금을 냈다.



여행 전반은 도장 깨기 같았다면, 후반은 여유롭게 천천히 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야지.

원래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텐데, 신기하게 나는 얼른 훌훌 털어버렸다.

그렇게 난, 여행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잭슨, 미시시피 & 롱뷰, 텍사스(Jackson, Mississippi & Longview, Texas)


영화 헬프(The Help, 2011)의 배경인 잭슨을 조금 구경한 후 다시 텍사스로 돌아갔다.

근처 마트에서 에스프레소 여섯 캔, 식빵 한 봉지, 대용량 치즈볼을 샀다. 졸음 깨기용이었다. 과자를 오독오독 씹고 커피를 들이키며 거의 쉬지 않고 10시간을 운전했다.

내 옆자리를 지켜준 고마운 친구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넓고, 너무나도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데 왜 나는 '다양성'보다 '획일성'에 집착할까?

왜 나만의 것을 창조하기보다 안전한 남의 것을 따라 하고 싶어 할까? 그러면서 왜 여전히 두려워할까?

많은 생각을 하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텍사스였다.



달라스, 텍사스(Dallas, Texas)


텍사스의 대도시, 달라스로 왔다.

이날은 도시 분위기에 맞춰 '센 언니' 컨셉으로 가짜 속눈썹도 붙이고 머리도 고데기로 웨이브를 넣었다.



카우보이 모자와 부츠만 있으면 딱인데!
밤 10시까지 박물관, 공원, 카우보이 동네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이날 나의 목표는 밤샘 운전을 해서 뉴멕시코로 넘어가기.



가까운 휴게소(rest area)에 들러 화장실만 들르고, 출발하려는데 너무 졸려웠다. 에스프레소가 소용없을 정도로 라니. 결국 차박을 하기로 결심하고 겨울잠바를

이불 삼아 누웠다.

그날 밤,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게 낭만인지 고생인지. 다시는 차박은 안 한다 다짐했다.

차박하기 2시간전 해맑게 찍은 사진


시더크리스트, 뉴멕시코(Cedar Crest, New Mexico)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콧물을 연신 풀며 운전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근처 마트 주차장에 주차한 후 다시 잤다.



"똑똑, 여기서 자면 안 돼" 직원이 날 깨웠다.

먹다 남은 식빵, 치즈볼, 빈 커피캔 들로 지저분한 차 안.

머리는 헝클어진 채 콧물을 흘리고 있는 나.

아, 홈리스인 줄 알았나 보다.



민망함에 얼른 다음 숙소로 갔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튀김우동라면 하나 후딱 먹은 뒤

히터 틀고 잠바까지 입고 갔다. 참 다이나믹했다.

숙소 다인실을 혼자 썼다.


앨버커키, 뉴멕시코(Albuquerque, New Mexico)


놀랍게도 감기가 하루 만에 나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새로운 도시, 앨버커키를 돌아다녔다. 이곳은 양털 잠바를 입어야 할 만큼 춥고, 코로나 때문인지 사람도 없고, 어딜 가든 괜히 쓸쓸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여행 잘하고 있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냅다 아빠 흉을 봤다. 원래라면 '왜 여행 중에 그래, '라며 짜증 냈을 텐데, 묵묵히 들어줬다.

여행하면서 내 마음이 넓어졌나 보다.

뭔가 아기자기 하면서 외로워 보였던 이곳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


여행의 마지막 날이자 2021년의 마지막 날이 왔다.

원래 계획은 피닉스에서 카운트다운하고 불꽃놀이까지 보고 새벽엔 LA로 돌아가는 거였다.

그런데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래서 집까지 가기로 결정!

그렇게 나는 앨버커키에서 LA까지 하루 만에 운전해서 도착했다. 근 800 마일 (1300km)의 거리였다.

집에 도착하니 시계는 11시 58분.



카운트다운은 하고 자야지, 했는데 옷도 안 갈아입은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 아니 기절했다.

그렇게 나의 11일간의 미국 횡단 여행은 막을 내렸다.

비가 와서 더 운치가 있던 피닉스


아 그냥, 다음 생엔 부랑자로 태어나 마구 떠돌아다녀야지.




[작가소개]


전민교 작가님은 청각장애를 갖고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듣고 치유해 주는 심리상담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minkyo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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