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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이 머무는 자리

[은나무 작가]

by 은나무


25년 11월 14일.

내가 근무하는 남성컷 전문점.

잠시 한가해진 늦은 오후였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수다를 떨던 그때
익숙한 습관처럼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통유리 밖에서 반가운 얼굴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무표정하던 청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나도 모르게 피식 같은 미소가 따라 나왔다.



이곳은 신도시의 끝자락.
아파트 단지 가까이에 공단이 있고 아직도 짓고 있는 아파트가 있는 아직 형성 중인 동네다.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 손님도 많이 있다.

그들과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겨우 간단한 단어나

몸짓 손짓으로 소통할 때도 많다.




그런데 2년 전 어느 날.

미용실에 찾아온 청년은 달랐다.
하얀 피부 짖은 눈매 선한 눈동자.



그리고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위는 텅 비어 있고 옆과 뒷머리만 길게 자란 머리.
그저 솜털 같은 머리카락만 겨우 있는 부분에

흑채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선생님, 제 머리 때문에 손 더러워질 수 있어요. 죄송해요.”
능숙한 한국말에 놀란 것보다 나를 배려해
사과부터 하는 그의 태도에 더 놀랐다.



그 뒤로 그는 한두 달에 한 번씩,
해맑은 얼굴로 문을 열고 나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선생님, 저 이만큼 한국말 늘었어요.”


“선생님, 저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야기는 늘 그의 입에서 먼저 시작됐다.
어려운 단어를 잘도 골라 사용하는 모습이 그냥 수다가 아니었다. 그 청년에게 나는 ‘편안한 한국어 연습 상대’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그 청년의 머리손질법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하다가 그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여기 옆머리는 드라이로 이렇게 ‘죽이면’ 돼.”


“죽여… 요? 죽어요?”


순간 눈이 동그래지며 당황하는 얼굴.
나는 한참을 웃었다.


“아니 아니, 머리를 눌러준다는 뜻이야!

미안~ 한국식 표현이야.”


그러자 그는 또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죽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한국어… 너무 어려워요.”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천천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청년이 말했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


저는 드디어 제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우와 그게 뭔데요?그리고 저는 잘 지냈어요”


“대학원에 가요. 카이스트요.”

내가 더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그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한 가지 아쉬워요.”


“뭐가요?”


“선생님 못 보는 거요. 저… 선생님하고 이야기하는 거 재밌었어요.”


"나도 재밌고 좋았지 그런데 너무 잘됐다. 축하해요!"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누군가에게 나는 헤어지기 아쉬운 사람인가?



청년은 이어서 말했다.

“선생님… 저 요즘 책 하나 읽어요.”


“무슨 책?”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

"그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고객님처럼 밝고 순수한 사람이니까 그런 말을 해주는 거야. 그리고 고객님도 다정하고 친절해서 어디 가나 환영받고 다른 사람과 또 그런 만남이 생길 거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한테 다정하게 이야기 들어준 사람…

거의 없어요.”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처럼.


"이사가기 전에 꼭 다시 한번 들릴게요"




그 청년이 돌아간 뒤
함께 일하는 선생님이 말했다.


“저 고객님 대단한 친구였네요.

나는 그냥 말 많다고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말하면 머리 움직여서 힘들다고만 했지 실장님은

눈치가 빨라서 그런가 한국어 공부하는지 어떻게 알고

다 받아줬네요.”



그때 깨달았다.



그가 나에게 한 말은
그냥 예의 바른 칭찬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 다정함이 필요했던 순간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다정함은 누군가의 하루를 살리는 힘이 된다.
때로는 나의 하루도 그렇게 누군가가 살려준다.




오늘 은나무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도

작은 따뜻함이 필요할지 몰라서.

조용한 미용실 한 모퉁이에서 시작된

이 다정한 인연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가만히 닿기를 바라면서 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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