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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정 Oct 02. 2024

커트의 달인 은정샘

만원에 판매하는 7 분짜리커트

나는 지금 나이스 가이라는 남성 컷 전문점에서 일하고 있다. 나이스 가이는 블루클럽, 맨즈헤어, 킹스맨헤어, 포맨헤어들과 같이 바버샵 하고는 다른 단조로운 서비스로 차별을 내세운 저가형 남성전용 미용실이다.


내가 한창 미용일을 할 때만 해도 블루클럽이나 나이스가이처럼 남성컷 전문점은 실력도 기술도 없는 초짜 미용사들이 남자머리 기술정도 익히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했었다.

가뜩이나 커트가격이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는 났어도 평균 만원에 1-2천 원 정도 차이가 나는 저렴한 기술을 파는 곳이라 여기며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토록 싸구려라 생각하며  

초짜 디자이너 들이나 있다고 여겼던,

내 가족들은 절대 가지도 못하게 했던 그곳에서 대단히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다.


내가 나이스 가이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10년 전업주부로서 다시 미용업계에서 일한다는 게 크게 부담이 있었다.

내 아무리 자부심 철철 넘치는 기술자였어도 10년이나 녹슨 실력은 나 스스로 인정해야 했고 그나마  접근이 쉬운 남성컷전문으로 눈을 돌렸다.


처음엔 나도 고가의 바버샾들을 찾아봤다.

내가 아무리 10년을 집에서 살림만 했어도 만 원짜리 커트나 하는 초짜 디자이너는 아니지......

라고 생각했지만 내 나이 42........ 어디에도 40대 이상 면접 보러 오라고 하는 곳이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나는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려 저가형 남성전문 미용실을 알아봤다.

초짜들이 바글대는 그 업계에서 차라리 나처럼 실력자가 찾아가면 내가 거기서 더 돋보이겠지!!


그런 자만심을 어깨에 잔뜩 신코 약간은 긴장감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은 다른 건 없었다.

그냥 나이스가이 인사 담당자 머리를 깎아보는 것....


다행히 10년 동안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짐짝이 돼버린 지 오래된 베란다 어딘가 처박혀두었던 가위와 이발기는 기름칠 두어 번에 생생히 다시 살아났고,

긴장했던 나의 두 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머리를 깎고 있었다.


20분 정도 흘렀을까? 어림어림 기억나는 데로 인사 담당자의 머리를 마무리했다.

막상 머리를 자르고 보니


'아 나는 여전히 손재주가 있구나! 10년이나 쉬었는데 역시나 까먹지 않았어!'


스스로 기특해하며 당연히 출근하라고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고,

역시나 출근하시면 되겠다는 대답을 듣고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나를 잘 아는 동생이 가끔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언니의 근자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근자감이라니 나는 늘 근거 있는 당당함을 장착한 기술자라고!! '


그렇게 스스로를 생각하며 당당하게 나이스가이에 입성했다.


그런데 웬일이니...........


미용실에서 예약제로 한분 한분 시술했던 나의 그 자신감 넘치며 도도했던 손기술은 출근 첫날부터 쓰디쓴 충격을 맛봤다.


디자이너 한 명당 평균 10분에 1명꼴로, 주말 하루 40-50명씩 커트를 하는 이곳은  

한마디로 커트공장 같은 곳이었다.

여러 디자이너의 동시다발 시끄러운 이발기 소리, 탁탁 거리는 가위소리, 티브이소리

모든 게 정신 사나웠다.

사각사각 유연한 가위질 테크닉을 선보이며

슥슥 부드럽게 이발기를 놀리는 나의  예술 같았던 커트 기술은  이곳에선 참 쓰잘 떼기 없이 그저 시간만 오지게 축내고 고객에게 지루한 커트시간을 선사하는 허접한 쌩초짜 디자이너였다.


초짜들 사이에서 돋보일 거란 자신감은 어디 가고 이 바쁜 와중에 나까지 걸리적거리는 짐짝처럼 느껴졌다.


와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 이곳은 마치 남자커트 숙련도 만렙은 된 사람들만 모인 곳 같았다.


나는 그저 이곳에 견학온 학생 수준으로 자신감이 급 하락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났다. 나도 제법 일머리도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꼼꼼하고 빠른 일처리를 자부했는데,

다른 선생님들 3명은 거쳐갈 때 나는 1명을 마무리하고 있으니.....

자존심에 스크래치 정도가 아니라 정말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멘붕 그 자체였다....


그렇게 첫날 일을 마치고 어리둥절 정신 사나운 가운데 집으로 돌아왔고 긴장이 풀린 나의 팔다리 어깨 아주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접근이 쉽다 여기고 만만하게 보며 내 기술이 돋보일 거라는 아주 야무진 나의 꿈은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그래 세상일 겪어봐야 알지...

네가 뭐라고 그렇게 무시하고 잘난 척을 했던 거니...


다음날 나는 대단히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힘을 내 출근을 했다.

손은 따라주지 않는데 마음은 바빴고, 그러다 보니 가위에 손이 베이는 일도 잦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몸이 천근만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다 보니 어느덧 나도 일이 조금씩 익숙해졌고 20분 걸리던 커트 시간이 15분으로 단축됐다.

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내 커트 시간을 점장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체크하셨고,

어느 날 나에게 말씀하셨다.


최소 한 명당 커트시간은 10분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염색을 바르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미용실처럼 느긋이 일하면 안 된다,

빠르고 정확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등등

미용짬바 10년도 넘은 내가 받아들이기에 자존심 상하는 잔소리였지만,

더 충격적인 이야기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점장님은 나를 처음 본 날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일당 10만 원이라 치고 그중 반나절 일한값 5만 원만 주고 점심시간에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일이 너무 서툴고 못하고.... 심지어 너무 촌뜨기같이 생겨서 미용사처럼 보이지도 않는다는

외모 비하 발언까지..... 하 … 내 잘난 그 근자감은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점장님 남편분이 나와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잘 지낼걸 예상하셨는지,

보내지 말고 같이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 일당이 아까우면 본인이 주시겠다며 점장님을 설득해서 일하게 됐고, 내가 그렇게 일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르고 10년을 놀다 나와도 인정받는구나 생각했다.

나 스스로는 적응기간이 필요했어도 남들은 모르네? 착각을 하고 있었으니....


정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더 열심히 했다.


티브이나 동영상, 길에서도 남자머리를 유심히 봤고 내가 모르는 디자인들은 유튜브를 찾아보며 배웠고 남성컷 전문 강의도 찾아보고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들을 열심히 찾아보고 손에 익혔다.

매번 고객들이 올 때마다 새로 익힌 기술을 적용해 보며 점차 나의 기술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나랑 너무 잘 맞는 일을 찾은 것이다.

말을 많이 하며 감정 노동 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고객의 마음을 훔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있는 그대로 결과물에 대가를 받는 일이 참 단조롭고 재미있었다.


어느덧 나도 1년 반이란 시간이 지나 이제는 10분 안에 커트를 마무리한다.

보통 7-10분에 남성컷 한 명을 마무리하는데 그렇다고 대충대충 깎아내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제 고객의 니즈를 분명히 파악하는 센스와 정확한 기술을 겸비한 능력 있는 디자이너가 되어가고 있다~!!


커트공장의 속사포 같은 커트 기계가 아니라 생활의 달인에 나갈법한 커트 달인이 되었다.

나는 내가 일하는 나이스가이 남성컷 전문점을 저렴하고 그냥저냥 하는 만 원짜리 가게가 아니라

거북섬 동 6개 미용실 중에 제일 소문난 미용실로 만들어 가보려고 노력 중이다.


남성컷 전문점인데 가끔 손님 없을 때 찾아오는 여성 고객들도 간단한 커트나 염색 같은 시술을 해드렸더니 제법 가성비 좋아 찾아오시는 여성 고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멀리 대부도에서 40분 걸리는 거리를 다녀가시는 분도 생겼다.

꼬마 손님부터 80대 어르신들까지….

나를 찾아오고 나를 기다리는 고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나는 지금 만 원짜리 커트를 파는 저렴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만원의 행복을 선사하는 거북섬 최고의 디자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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