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기

계획없는 반차

by 천천히 한걸음

매일 퇴사를 생각한다.

나름 회사 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당장 내일 마주할 일들이 무섭고 두렵다.

해결하지 못한 일들 , 내가 책임져야할 업무들이 무섭다.


나름 즐거운 주말을 보 낸 일요일 저녁 위 통이 찾아왔다.

마치 어떤 손이 내 위를 쥐어 짜는 듯 했다.

급한대로 집에 있는 약을 먹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응급실에 갈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지지고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통증으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날이 밝았다.

정신은 깨었으나 눈은 떠지지 않는 새벽

나는 마치 당장 실행에 옮기기라도 할 사람처럼 계획을 세워보았다.


'내가 퇴사를 하게 되면' ... 이란 가정하에

현실적으로 남편의 월급을 쪼개서 살기 위한 방안들을 세워보았다.

우선 집은 값이 싼 지역으로 옮기고

아이의 사교육은 영어 하나만 남기고 없애자.

나의 운전자 보험과 남편의 저축성 보험도 마찬가지로 없애자.

생활비는 현금으로만 쓰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 꽤 그럴듯한 플랜이 만들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출근 준비 시각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기계처럼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고 회사로 향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새벽에 세웠던 상상의 계획(?)들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출근 시각 10여분을 남기고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시동을 끌 수가 없었다.

추운 날씨를 핑계로 , 히터바람을 느끼며 잠깐 눈을 감았다.

바쁜 출근시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1시간 같은 10분을 보내고 겨우겨우 사무실로 들어와 앉았다.

영혼은 어디 두고 껍데기만 앉은 듯 했다. 일은 헛 돌았고 잠깐 잠잠했던 위통이 도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가 천둥같이 느껴졌다.

잠깐이라도 피해야 했다.

급히 근태시스템에 접속해서 오후 반연차 사용 신청을 했고

일사천리로 승인까지 끝마쳤다.


그 때부터였다 위 통이 없어진것은...


이상했다. 아직 회사를 벗어난 것도 아니고 , 일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오늘 오후 잠깐 쉼으로 해서 내일 더 일이 많아질텐데..


잠깐의 오후 시간이 생김으로, 숨통이 트였다.

새삼 연차제도라는 것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가서 절이라도 해야 겠다.


그렇게 반연차를 내고 나니, 우습게도 일이 되었다.

내 손에서 , 입에서 일이 시작되었다.

점심시간 전에 일을 마치고자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계획한대로 일을 마치고 부재중 설정까지 걸어놓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며칠전 까지 매섭게 춥던 날씨가 주말부터 부쩍 따뜻해졌다.

히터를 틀지 않는 차 안도 공기가 훈훈했다.

차 앞유리로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 밝다.

오렌지 속살 같은 주황빛이다.

햇볕가리개도 내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집으로 향하기 전 아이의 유치원에 들렸다.

"엄마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하고 놀라는 동그란 두 눈이 사랑 스럽다.

"상하 보고싶어서 일찍 왔지" 라는 나의 거짓말에 스스로 슬핏 웃음이 난다.

동네 김밥집에 들러 김밥을 포장해 집으로 왔다.

유치원에서 점심을 먹어 배부르다는 아이에게 굳이 몇 조각을 먹이고

"맛있지? 맛있지?"하고 확인한다.


아이는 잠들고 , 책 한권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잠든 아이의 숨소리와 책 구절로 나를 또 다독여 본다.

오늘 잠깐의 도망이 결코 나의 패배는 아니었다고.


나는 나약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때로는 멍청하게 도망치고 숨기도 한다.

항상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걱정하고 숨가빠한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도망치기도 한다.

시간은 속임이 없다.

도망자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조금 있으면 또 잠자리에 들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오늘의 도망이 내일에 어떤 영향을 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또 도망치고 싶으면 나는 주저없이 휴가를 쓰고 나와 버릴 것이다.

나의 숨구멍을 트이게 할 것이다.

계획없는 반차. 절실했고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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