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 허리춤에 닿은 아침에 거실창블라인드를 올리면 눈이 커지며 기분이 좋아져요. 정말 확 좋아집니다.
성숙미가 돋보이는 가을나뭇잎들이 입이 쩍 벌어지는 감탄을 주거든요.
며칠 전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가을풍경을 감상하다 문득 생각했어요.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는 은행나무가 없네. 노란 은행잎이 얼마나 예쁜데. 아쉽다.'
이사하기 전에 살던 오래된 아파트가 생각났어요. 그 아파트단지에는 은행나무가 많았거든요.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으로 봄인 양 화사했어요.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사이로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어요.
가을이 깊어지면 노란 은행잎이 눈처럼 내린 꿈같은 아침을 맞이했어요.
무척이나 행복했어요. 그러다 어느 가을, 나무가 앙상한 것으로 봐서는 밤새 은행잎이 떨어졌겠는데
바닥은 깍쟁이처럼 말끔했어요. 뾰로통해 걷고 있을 때 아주머니 두 분이 뒷짐 진 채
나무를 올려다보며 대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쁘쥬?”
“뭐가 이뻐? 다 떨어지고 몇 개 안 남았구먼.”
“그래도 노란 게 이쁘잖어요. 어젠 더 이뻤슈.”
“근데, 밤새 다 떨어졌나?”
“아녀요. 경비 아저씨들이 아침에 월매나 투 두러 팼나 몰러요.”
"그려어? 그랬구먼"
'아~ 그랬구나. 그래서 은행잎이 안 보이는구나.'
나에게 낭만인 은행잎이 경비 아저씨에게는 보통 성가신 게 아니겠다는 생각이 스쳤어요.
이른 아침부터 몰매 맞은 은행나무는 기겁하고 몸을 흔들어 잎을 털어냈을지도 몰라요.
여기저기 은행잎이 가득 담긴 큰 자루가 웅크린 채 서로 기대고 있더라고요.
경비 아저씨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아침 일찍부터 고생하셨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내가 만약 경비였다는 어땠을까. 발 디딜 틈 없이 수북이 쌓인 노란 은행잎을 보며 내 얼굴은 노랗게 질렸을 테고, 요놈들 맛 좀 봐라 하는 심정으로 빗자루를 들었겠다 싶더라고요.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면 생각은 달라지죠. 가을을 느끼고 싶은 나의 마음과 아파트 단지를 깨끗하게 관리해야 하는
경비 아저씨의 입장을 나란히 놓고 보니, 아이 같은 내 마음이 보여 피식하고 싱거운 웃음이 나왔어요.
평소에 일을 야무지게 하셔서 마음에 들었던 경비 아저씨가 굽은 허리로 지나가실 때
‘저분이구나. 이렇게 깔끔하게 청소하신 분이.’ 생각하며 큰 소리로 인사했어요.
“안녕하세요. 은행잎 치우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내가 할 일인데요, 뭘.”
“그래도요. 애쓰셨어요. 고맙습니다.”
“예. 다녀오세요.”
경비 아저씨와 저는 미소 담은 인사를 주고받았어요. 그날의 한 장면이 이젠 추억으로 남았어요.
가을은 현충사 옆 곡교천에나 가서 타야겠어요. 가을이 깊어진 곡교천은 샛노란 은행나무 세상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