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박꽃 Jun 04. 2024

이유 있는 수다

뭘 좀 아는 개미들

멧비둘기, 까치, 이름 모르는 새들 그리고 매미의 치열한 외침이 내가 사는 세상에 빼곡했다. 35도에 육박하는 숨 막히는 매일, 그야말로 여름은 정점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다 개미 한 마리가 손톱만 한 빵쪼가리를 물고 계단과 계단 사이의 벽을 오르는 게 보였다. 놓치면 다시 물고 또다시 물기를 반복했다. 개미를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까마득하고 절망적이었다. 빵쪼가리를 연거푸 놓치는 걸 보니 무거운 게 분명한데 90도의 경사를 과연 오를 수 있을까. 끝내 빵쪼가리는 바닥에 떨어질 테고 개미는 그만 포기할 거라고 아예 결론 내리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 달랐다. 개미는 포기하지 않았고 나는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내겐 겨우 한 칸의 계단이 개미에게 어떤 의미인 걸까. 소나무아래의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개미의 마음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개미가 지금 자기의 삶에 열심이라는 건 분명했다. 까맣고 조그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실의 기운에 마음이 일렁였다. 평지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어 쪼그리고 앉아 개미의 성공을 응원하고 있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른 개미가 다가가 빵쪼가리를 함께 물고 계단 위까지 올려놓고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비록 바쁘지만 돕는 건 당연한 거라고, 나도 수시로 도움을 받는다고 말하는 듯이. 협력의 아름다움이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었다. 두 마리의 개미에게 감탄했다. 그 새까맣고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하고 싶었다.


 다른 개미가 도와주러 오기 전 '만약 내가 개미와 빵쪼가리를 계단 위까지 올려주면 개미에게 기적일까, 월권일까. 월권이라는 답이 엄숙하게 다가왔다. 선의를 베풀겠다는 좋은 의도와 월권을 구별하기에 지금보다 미숙했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해 혼자 있어도 낯 뜨겁다. 그날 그 개미에게도 기적은 일어났다. 빵쪼가리를 함께 옮겨 준 개미가 바로 그것이다. 자연스러운 기적이었다. 어쩌면 기적은 바람이 지나가듯 흔하게 일어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머릿속에 그린 것이 아니라 미처 모르고 지나쳐서 그렇지. 그렇다고 뜬금없는 기적을 바라지는 않는다. 인생의 쓴 맛을 여러 번 보며 알게 되었다. 강 건너편으로 가는 게 목표라면 두려워도 강에 발을 담가야 한다. 그래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빵쪼가리를 포기하지 않은 개미가 도움을 준 개미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좋은 사람에게도 힘든 일은 일어나지만 또 다른 좋은 사람이 한 번씩 등장해 명장면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렇게 보태진 힘으로 하루씩 살고 살다 보면 문제도 지나간다.


그 개미처럼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만나며 산다. 어려움을 헤치며 가다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만큼 버거운 지점을 만난다. 그럴 때면 세상은 왜 이리도 내게 비협조적일까 신은 무슨 이유로 내게 침묵하는 걸까 고개를 떨구게 된다. 그렇지만 내가 만난 개미처럼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지금 할 일을 하며 잘 살아내고 있다. 수많은 걱정이 켜켜이 쌓여있지만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거, 세수하는 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일 같지도 않게 여겨지는 지금의 할 일이 우선이다. 별거 아닌 듯 여겨지는 그 빵쪼가리가 개미에게는 하늘땅만큼 중요해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을 존중하게 된다. 남의 삶에 대해 쉽사리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자신의 삶에 장난인 사람은 없으니까. 두 마리의 개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는 존경심도 담겨 있었다.


시간이 흘러 문제가 해결되어 한시름 놓게 되면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난날이 한눈에 보인다. 내가 만난 문제와 동행하는 동안 삶을 대하는 마음자세가 반듯해지고 온순해지며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 보인다. 그중 나 자신과 가까워져 내가 나를 협력자로 얻었다는 게 가장 큰 결실이다. 문제해결을 위해서 가장 먼저 얻어야 할 힘은 나 자신이 주는 힘 곧 나 자신과의 협력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문제를 만나는 건 불행이 아니라 나를 찾아 떠나는 탐험 같은 기회고, 지나온 걸음의 속도를 늦추어 혹시 모를 앞으로의 위험을 대비하라는 방지턱 같기도 하다. 문제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문제를 기회로 이용할 줄 아는 뭘 좀 아는 사람으로 산다면 상황과 별개로 낙낙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개미가 풀숲으로 사라지고 나도 나의 길을 갈 때 예상했다. 모로 앉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그 순간이 떠 오를 때마다 좋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듯 하게 될 것이라는 걸. 찰나였지만 여운은 길고 의미는 깊다.

작가의 이전글 시골이 키운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