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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Nov 20. 2021

연말 결산

한 해의 큰 산을 넘고

어쨌거나 직장은 성과와 실적을 무시할 수가 없다. 난 애초에 경쟁에 심하게 취약한 편이라서 취업 때부터 최대한 조용히 살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왔지만 시대의 흐름은 무섭게 그간 조용했던 곳들까지도 파고든다. 

해외 사업이 재밌어 이번 부서에 지원하게 됐는데 다른 것은 다 좋지만 역시나 이곳은 실적이라는 걸 하반기에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시행착오와 고생이 많았지만 그 와중에 많은 일을 처리했는데 정작 연간 실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 사업은 지지부진 진행이 되지 않았다. 나도 그렇고 다들 성격이 느긋한 타입들은 아니라서 만일 상대편에서 정상적으로만 호응해줬다면 벌써 끝냈을 일이었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덕분에 여름휴가며 개인적인 일정까지도 엉망이 됐던 게 올 하반기 초였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업무 외 일정까지 영향을 받는데 정작 마무리가 안 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꼬이는 이유가 상대편의 억지에 있으니 답답하면서도 잘 버티고 있었는데- 이쪽 경험이 많은 사람들 표현에 따라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부서의 분위기도 윗분들의 분위기도 어느새 바뀌기 시작했다.

부서 뿐 아니라 본부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연간 목표 달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로 온통 쏠렸다. 내가 느긋해서 여기까지 밀리며 온 게 아닌데도 실적 압박은 하루가 다르게 세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놈의 내부 목표 실적 때문에 결국 막판에 가서 원칙도 기준도 다 포기하고, 밀어내기 하면서 우리 권위도 체면도 다 버린다고- 말로만 듣던 분위기가 이런 거였구나 드디어 체감하게 되었다. 

한 달 남짓 팽팽하면서도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꾸역꾸역 뭔가가 진행되다가 미뤘던 여름휴가를 가을에 다녀오자 바로 밀물에 둑 터지듯이 일이 진행되었다. 그동안 무의미하게 지나가버린 몇 달 치 일이 이번에는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모두 쏟아졌다. 

사업의 승인과 그 뒤를 이은 큰 행사. 연간 제일 큰 일정으로 잡았던 일들이 쏜살같이 빠른 일정으로 진행되었고 과연 될까, 하면서 결국 이번 주에 모두 마무리 되었다. 무릇 행사란 큰 탈 없이 지나가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했는데 그런 면에선 아주 무사히 지나갔다. 처음엔 평범한 규모로 예상하며 시작했던 행사가 계속 이게 달라붙고 저렇게 부풀려져서 결국은 몇 배 큰 일이 되어 끝났지만. 다행히 좋은 팀원들과 함께 무사히 끝냈다.

연말 결산이라는 느낌이 실제로 느껴진 건 묘하게도 올해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큰 사업을 담당해도 대부분 여름 전에 끝이 났기 때문에 연말 가까이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스트레스도 받고 막판에는 정말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끝이 나자 얼마나 속이 후련하던지. 적당히 도전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라면, 이렇게 넘어야 할 산이 분명할 때 넘어보는 재미도 괜찮다. 한 해를 맺고 끊는 그런 맛이 있달까.

조용하고 한가롭게 지나가면서도 정말 재미가 없고 묘한 스트레스를 받는 부서도 있었지만 역시 일은 제대로 된 일을 해야 좋은가보다. 물론 가장 중요한 변수는 같이 하는 사람이고. 너무 벅차고 정신없고 험했던 한 해였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좋았다. 우리 팀장님이 즐겨 하시는 말마따나 이제 공은 저 쪽 편으로 넘어갔다. 연말은 여유롭고 따뜻한 시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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